160213 : 푸른사자 : a,k.a 해품달썰 과거시점 3부
* 트위터에서 풀었던 썰인지라 오탈자 및 반말체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 본 썰은 소설 및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설정 등을 차용하고 있습니다.
- 찬열이는 훤+양명, 백현이는 연우+염 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 그 외 무속트릭 등이 동일하게 등장하니 불쾌하신 분들은 뒤로 가주시면 감사드립니다.
* 근본 따위 없는 어휘 등....양해 부탁드립니다8ㅅ8
* 너무 오래간 만에 찾아오는 지라...8ㅅ8
1부 : http://weeklychanbaek.tistory.com/57
2부 : http://weeklychanbaek.tistory.com/60
a.k.a 해품달 썰 과거시점 3부
W. 푸른사자
대비전을 나서며 찬열이는 김내관에게 아주 조용히 제 전각에 들렀던 이들을 모두 조사하라고 명했어. 누구의 편이든 제 주변에서 정보를 밖으로 빼돌리는 간자의 존재는 위험하다는 걸 찬열이는 누구보다 잘 알거든. 김내관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명을 이행하겠다는 뜻을 표했어.
궐에서 찬열이 대비와 암묵적으로 부부인을 내정하고 있을 때, 백현이는 아버님께 입궐을 그만두겠다는 뜻을 전했어. 백현이의 아버지도 단박에 그 뜻을 받아들였지. 그들과 뜻을 달리하고 있는 현 집권세력이 서서히 백현이의 존재를 거슬려하고 있었거든. 계속하여 입궐을 한다면 백현이의 신변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어.
다음날 백현의 아버지는 이제 대군마마께 배동이 필요치 않다고 사료된다며 왕에게 그의 뜻을 돌려 전했지. 왕도 단박에 그의 뜻을 눈치채고 그의 뜻대로 일을 진행시켜주었지. 대비 쪽도 백현이가 더 궐을 들락날락거러봤자 건제만 심해지지 좋을게 없으니 고요했지. 마음이 급한 건 찬열이뿐이었어. 이런 상황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거든. 그래서 김내관을 탈탈 털었어. 김내과는 땀을 삐질 삐질 흘리며 공자께서 너무 부담스러우셔서 그러시는게 아니겠냐는 대답을 내놓았지.
그날부터 찬열이는 사색에 빠져. 주제는 부담스럽지 않게 변공자에게 청혼하기! 였지. 한참이나 찬열이가 사색에 빠져있는 동안 시간은 흘러 백현이가 마지막으로 입궁하는 날이 되었어. 백현이는 얼굴이 반쪽이 되어서 등장했는데 평상시처럼 찬열이와 서책을 읽을 뿐 별 말이 없었지. 그건 찬열이도 마찬가지였어. 그에 마음에 급해진 건 주변 내관들과 궁녀들이었지. 막 자기들끼리 작전타임도 갖고 하는데 제일 중요한 왕자님이 별 말이 없으시니 원. 이제 시각이 거의 다 되어 백현이는 퇴궐할 시간이 되었어. 백현이가 마지막 인사를 나지막하게 하였지. 앞으로도 열심히 학식을 갉고 닦으시어 전하를 보필하는 불세출의 인재가 되시라고 말이야.
사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 기본적으로 이 나라에서 왕족은 관직을 얻을 수 없고 금상이 아무리 찬열이에게 잘 대해 준다한들 이복형제야. 찬열이가 뛰어날수록 견제해야하지. 그걸 모를 백현이가 아님에도 백현이는 그렇게 인사 했어. 그만큼 지금 심정이 어지럽다는 것 같아 찬열이는 뭐라 하는 대신 그저 계속 웃고만 있었지.
찬열 : 공자
찬열이가 나긋나긋하게 백현이를 불렀어.
찬열 : 내 청이 하나 있는데 들어 주시겠소?
완전 하대를 하진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말을 높인 것도 처음이라 백현이가 우왕좌왕하다 고개를 팍 숙이며 예 하고 대답했어.
찬열 : 다음에 입궐하실 때는 말입니다
백현이가 다음 입궐이라는 말에 어리둥절해졌어. 하지만 감히 고개를 들지는 못했지.
찬열 : 사헌부 대사헌 댁의 공자가 아니라 나의 부부인으로써 입궐해주세요.
그 말에 백현이가 홀린 듯 고개를 들었어. 그러자 찬열이와 눈이 마주쳤지 .감히 왕족과 눈이 마주치다니. 평소 백현이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야. 그런데 너무 놀라 계속 그러고 있자, 찬열이가 부드럽게 대답을 재촉했고, 백현이는 홀리기라도 한 듯 대답을 한 뒤 퇴궐을 했지. 손에는 찬열이가 정표랍시고 쥐어준 파란 노리개가 쥐어져 있었어. 찬열이는 제가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값진 것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굉장히 오래되고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소중히 간직한 티가 났지,
백현이가 정신을 차린 건 집 안에 들어서고 나서였어. 그제야 자기가 무슨 대답을 하고 온지 깨달은 백현이는 달나라까지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심정이었어. 당장 아버지 얼굴만 해도 어찌 볼지 걱정이 되었지. 그런데 무려 대군마마와 약조를 하였으니 지키긴 해야겠고.
백현이는 한참을 끙끙거리다 먼저 형님께 말씀드렸어. 형님은 처음엔 네가?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다, 요 며칠 끙끙대던 제 아우를 떠올려보고 왜 그랬는지를 직감하고는 머리를 꽁하고 쥐어박았어. 그런 일이 있었으면 형에게 말을 했어야지 하며, 아우를 혼내다 제 아우가 여태껏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싶어 그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 주었지, 그러며 궐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아냐고, 그런 곳에서도 가장 위험한 벼랑 끝에 매달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자의 동반자로 평생을살 수 있겠냐고 물었어.
백현이는 고개를 주억거렸지. 그런 자이기에 더 옆에 있어주고 싶다며 말이야. 그 대답에 형님도 한숨과 함께 그러면 그리 하라고 해. 너도 명석한 아이고, 찬열이도 총명한 왕자님이시며, 주상께서도 어지시니 욕심만 가지지 않는다면 큰 화 없이 일생을 평온히 보낼 수 있지 않겠나며 말이야. 그러며 한숨을 쉬고 아버지께는 본인이 말씀드리겠다고 하고는 백현이에게는 피곤할테니 그만 들어가 쉬라고 해. 백현이가 형의 말을 따라 들어가고, 형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쪽문을 넘어 부인에게 가 함께 상의를 했어.
사실 백현이 형의 직책 중 하나가 찬열이의 학문 스승님들 중 하나라서 형도 찬열이를 잘 알아. 어찌보면 백현이보다도 더 말이야, 찬열이 자체는 참 좋은 사내야. 그런데 그 주변이 너무 위태로운거지. 그래서 한숨만 쉬는 형에 비해 부인은 완전 밀고 나가. 도련님이 마음 고생하시는거 못봤나면서 형님을 탈탈 턴 거야. 사실 이 쪽 부부는 형님이 부드러운 선비의 느낌이라면 부인은 대장부 스타일이였거든. 그럼에도 뭐 쿵짝이 잘 맞아 첫눈에 반해 국경도 뛰어넘어 혼인 치루고 아주 잘 살고 있었어.
부인의 응원(?)에 힘입은 형은 아버지께 찾아가 전부 다 말씀드렸지. 그런데 생각이상으로 더 당황하시며 떠시기 까지 하는 거야. 그에 형님이 캐물었더니 오늘 주상전하가 살짝 말씀하시길, 이번 공주의 부마로 백현이를 간택하시겠다 했다는 거야. 현재 조정은 외척세력들이 송두리째 쥐고 흔들고 있었는데 그것들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젊은 세력들이 필요했고, 그 세력의 구심점이 백현이의 아버지셨거든. 그러니 공주와 백현이의 혼사를 계기로 백현이 아버지한테 힘을 실어줄 계획을 하고 있었던 거야 왕은.
그 소식을 전해들은 형님도 얼굴이 파리해졌지. 찬열이가 그리 약조를 받아내었다는 건 최소 대비의 허락을 받아냈다는 거였어. 그러니 지금 왕과 대비의 뜻이 처음으로 반목하는 정치적 상황에 백현이와 가문이 꼈다는 건데, 양쪽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하더라도 곤란해질건 뻔했지. 간택에는 왕실의 큰 어른인 대비의 힘이 가장 크게 작용하는데 만약 백현이가 사주단자를 보내면 대비가 단박에 부부인으로 간택해버릴거고, 그럼 왕의 의중을 거스르는 불충을 저지르는 것이오. 보내지 않자니 감히 대비라는 왕가의 큰 어른의 뜻과 대군과의 약조를 저버리는 일인걸 물론이고, 찬열이가 분명 상처를 받을텐데 그 판국에 아무리 온순하신 대비마마라도 백현이를 부마로 간택하시겠어? 당연히 안하시겠지. 거기다 대비마마의 의중을 제하고도 현재 부마자리는 외척 세력이 눈에 불을 켜고 얻어내려하는 자리야. 그런 자리에 왕의 심중만으로 백현이를 올리기에는 무리가 따랐지. 그러니 정말 오도가도 못한 상황인거야.
그런 상황에서 백현이의 형은 결단을 내려. 사주단자를 보내자고. 백현이가 만약 부마가 된다면 그토록 마음의 담아두었던 정인과 가족관계로 얽혀 평생을 앓아야하는 건 물론이고 부마는 관직에 나갈 수 없다는 법도에 따라 날개 또한 꺾이게 되었지. 백현이를 너무나 아끼던 형은 그런 자리에 동생을 보낼 수가 없었어. 그러니 불충의 죄를 무릅쓰고서라도 그리 하자 결단을 내린게지. 그게 어떤 풍파를 일으킬지도 모르고 말이야.
어쨌든 곧 찬열이의 혼례를 위해 금혼 령이 내려지고 백현이네 집안도 사주단자를 보낸 그날 밤. 대전에 든 백현이의 아버지는 왕께 부디 자식을 먼저 생각한 아비로써의 그 못난 맘을 헤아려달라며 눈물로 불충의 죄를 고하고 사직을 청했지. 그런 그에게 왕은 단호히 그런 일로 인재를 내칠 수는 없다며 물러가라 말해.
강직한 성품의 백현이의 아버지는 그런 왕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물러났지만, 사실 왕은 속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었어. 왜냐면 찬열이의 부인 자리에는 그 누가 되어도 상관없지만, 단 두 사람. 외척세력의 사람과 백현이만은 안 되는 거였어. 외척세력이 된다면 그들은 지금보다 더 큰 세를 얻어 전횡을 일삼을 것이니 안 될 말이었고, 백현이가 될 경우 사림세력이 왕의 세력이 아니라 찬열이의 세력이 될 확률이 다분했어. 비록 왕이 찬열이를 아낀다하나 제 왕위를 위험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지.
대사헌 집안의 자제답게 총명하다 소문이 자자한 백현이의 날개를 꺾는 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부마의 자리를 주려한 것도 그것이었어. 사림세력을 왕의 세력으로, 위험하지 않은 세력으로 만들어야했거든. 그렇게 왕이 고심하는 사이 다른 한 쪽에서도 현 사태에 대하여 열심히 고뇌 중이었지. 바로 외척 세력이었어. 사실 이들은 부부인 자리에 중전마마같이 그들의 사람을 올리려했어.
금상에게는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었거든. 그런 상황에서 왕이 급작스레 승하라도 해봐. 다음 왕위는 당연히 찬열이 몫이었어. 그러니 미래에 대한 대비 또는 투자의 개념으로 찬열이의 부인 자리를 탐내고 있었던 건데. 웬 사림 집안의 아들이 굴러와 꿰어차게 생긴거야. 그러니 머리가 아프지. 그러던 중 금상의 속내가 저들과 부합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를 이용해먹기로 결심해. 현재 그 자리에 대하여 뭐라 하기 위해서는 금상만큼 좋은 힘이 없거든. 그래서 중전마마를 통해 조심스럽게 전달하지. 백현이의 건강상태를 악화시켜 후보에서 제하게 하자고 말이야.
금상은 끊임없이 고민하지. 일단 백현이도 아끼는 아이이긴 하니까 말이야. 그러는 사이 간택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지더니 기어코 백현이가 간택되었어. 대비는 백현이를 가까이 불러 그 손을 잡더니 낮게 속삭였지.
대 : 네가 지켜다오
백현이가 조심스럽게 올려다봤을 때 보인 것은 위엄 넘치는 대비가 아니라, 찬열이를 닮아 큰 눈 한 가득 걱정을 닮은 고운 여인이었어.
대 : 여태까지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불안전하고도 위험한 길을 가게 될 아이다
대비가 백현이의 손을 토닥이듯 잡았어.
대 : 네가 부디 그 아이를 지켜다오
백현이가 눈을 아래로 깔았지.
대 : 너를 그 아이 옆에 두게 해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해줄 수 있을게 없는 어미의 부탁이란다. 나와 약조해주지 않으련? 그 아이를 지켜주겠다고?
백현이가 자세를 바로잡았어.
백현 : 그 분은 이제 지아비이기도 하시나 그 이전부터 제 주군이시기도 하셨습니다.
선왕께서 백현이를 찬열이의 배동이자 스승으로 옆에서 보필하라 명했을 때부터 찬열이는 백현이의 마음 속 주군이었어. 찬열이를 도와 정국을 평화롭게 하고 나라에 충을 바치는 것. 그것이 백현이가 제 손으로 정한 사명이었지,
백현 : 소신. 저의 지아비이시자 주군 되시는 그 분의 무엇이 되었든 지킬 것입니다.
대비가 흐뭇하게 웃었어. 어쩌면 왜 찬열이가 백현이를 고집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지.
왕은 아직 정식으로 혼례가 치러지기 전 모든걸 돌려놓아야겠다고 생각해. 그래서 강직한 백현이의 아버지가 아닌 어린 백현이를 설득하려고 늦은 밤 비밀스럽게 백현이에게 향하는데. 그곳에는 이미 백현이와 찬열이가 함께 있었지. 둘은 주위의 사람을 물린 채 작은 연못에 놓여 있는 아치 위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 왕은 그 모습을 보고 고하려하는 김내관에게 고하지 말라 손짓했어. 그리고는 손 내관만 붙이고 조심스럽게 그들의 뒤로 걸어가 전각 뒤에 숨어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지. 뒤에 있었던지라 찬열이도 백현이도 왕이 뒤에 서 있는 걸 몰랐고 김내관만이 진땀을 흘렸어.
찬열 : 공자
그냥 사소한 이야기들을 주고받던 찬열이가 곧 돌아갈 시간임을 알고 백현이의 손을 잡아보았어. 여인네처럼 고운 손은 아니었지만 험한 일이라고는 모르곤 산 명문가 도련님답게 흠집 하나, 굳은살 하나 없이 매끈한 손이었지. 그 손을 몇 번 만지작거리던 찬열이가 중얼거렸어.
찬열 : 고맙소
백현이가 고개 숙인 채 그리 말하는 찬열이를 고요히 쳐다봤어.
찬열 : 사실 그날 그대를 그리 보내면서도 자신이 없었소. 돌아와 줄 것 인지 아닌지에 대해.
찬열이가 손에 애기하듯 말을 꺼냈어.
찬열 : 내 옆자리라는 거. 힘든 자리니까. 발 한 번, 손 한 번만 잘못 까딱여도 역모라 몰리고,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감시당하고, 의미 부여당하고, 견제 당하는 그런 자리니까.
찬열이가 자조적으로 웃었어.
찬열 : 와 달라 하면서도 어느 한구석에는 오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소. 다른 집 도령들처럼 과거를 보고,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 다른 집 고운 여식과 혼인하여 평범하게 그리 살아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는데.
백현이가 연못에 비친 그들을 보았어.
찬열 : 보내주질 못했어. 놓지를 못했어.
찬열이가 한탄하듯 말했지.
찬열 : 그러지 못해
고개를 든 찬열이의 눈가는 마치 울 것만 같았어. 찬열이는 애써 웃으며 말을 삼켰지.
백현 :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백현이가 제 손 위의 찬열이의 손을 다부지게 고쳐 잡았어.
백현 : 제가 온 겁니다. 제가 선택하여 온 것입니다.
백현이가 웃어주었어.
백현 : 오래 전 비가 오던 그날, 전각 아래에서부터 마마를 지켜드리고 싶었습니다.
백현이의 눈에도 찬열이를 따라 물기가 가득 차올랐지.
백현 : 그러니 옆에 있게만 해주세요. 저는 그거면 됩니다.
백현이가 사랑스러운 것을 본다는 듯 찬열이의 뺨을 쓰다듬었어. 그 모습을 본 왕은 백현이가 절대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걸 깨닫고 조용히 침전으로 돌아갔지. 김 내관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제가 왔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명을 내려 단단히 입을 봉하고 말이야, 그것도 모르고 저들끼리 한참 꽁냥 거리던 찬열이와 백현이는 김내관이 편치 않은 기색으로 이제 돌아가셔야 한다고 고하자, 그제야 일어났어. 찬열이의 아쉬운 작별인사를 뒤로하고 제 처소로 돌아가던 백현이는 무언가가 생각난 듯 다다다 달려왔지. 평소 법도를 지키던 잔소리꾼 백현이가 그리 뛰는 건 처음 보는 일이라 찬열이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있는 사이. 백현이가 찬열이의 손을 쥐어주더니 그 손에 찬열이가 주었던 노리개를 쥐어주지.
백현 : 제가 돌아왔으니 이제 그건 더는 필요 없는 거지요?
백현이가 싱긋 웃으며 말했어. 찬열이는 제 마음의 표시로 준 것이라며 가지고 있어 달라는 부탁과 함께 백현이 손에 쥐어주려 했지만 백현이는 받으려하지 않았지.
백현 : 제가 받기에는 너무 귀한 것입니다
찬열이는 내심 시무룩해졌어. 사실 그 노리개는 대비께서 입궁하실 적 모친께서 쥐어주신 것이었지. 그러다 찬열이가 성년이 되던 해 찬열이가 물려받은 것이었어. 각시에게 주라며 말이야. 그래서 백현이에게 준 것이었는데. 따지고 보면 노리개는 여자들의 장신구지 사내 것이 아니어서 백현이가 싫어하면 어쩌지 싶어, 주고서도 다른 걸 줄 걸 그랬나 싶어 머쓱해하기도 했는데 다시 제 손에 돌아오니 시무룩한 게지. 그 마음을 안듯 백현이는 예쁘게 웃으며 너무 귀해 가지고 있기 겁나 그런 거라고 찬열이의 마음을 달래주다, 슬쩍 너무 고운데 사내라 장신구로 쓸 수도 없으니 그게 마음이 걸린다며 다른 주인을 찾아주시는 게 어떠냐는 말을 덧붙였다가
찬열 : 싫소!
콧김까지 내뿜으며 흥 거리는 찬열이와 직면해야했지. 주변에 내관들과 궁녀들이 그 귀여운 작태에 소리죽여 웃는 것이 느껴졌어. 백현이가 쩔쩔매는 사이 김내관이 백현이에게 뭐라 속삭여주자 거기서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백현이가 웃으며 노리개가 쥐어진 찬열이 손을 감쌌어. 그러며 허면 그걸 제 정표라고 생각하고 받아 달라 말했지. 대군께서 가장 귀한 걸 주셨 듯 이제는 제게 그게 가장 귀한 것이니 그걸 정표로 받아달라고 말이야
찬열 : 그래도
찬열이가 큰 눈을 굴리는 사이 백현이는 찬열이의 손을 굳게 다물리게 하고는, 그걸 장표로 삼아 나중에 제가 헤매거나 잘못된 길로 가려하면 그걸 보여주시며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이끌어달라며 웃었지. 그 웃음을 잠시 멍하니 지켜만 보고 있던 찬열이는
찬열 : 그, 그러면.
제가 주었던 것을 다시 증표로 받았어. 백현이는 뿌듯하게 웃으며 찬열이를 배웅하고 제 처소로 들어갔어.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누군가가 또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지. 그 누군가는 눈물을 대롱대롱 매달고 왕의 침전으로 뛰어 들어갔어.
공 : 아바마마
고할 틈도 없이 들어가서는 왕의 품에 안겨 운 그자는 공주였어. 사실 공주는 백현이가 입궁할 때부터 남몰래 짝사랑해왔어. 그런데 공주라서 함부로 나설 수도 없고 발만 굴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부왕이 부마로 백현이를 만들어 주겠다, 약조를 해 얼마나 설랬는지 몰라. 그런데 별안간 부부인으로 간택이 되더니, 왕께서도 그 약조를 모르는 척하니 속이 얼마나 탔겠어, 그래도 멀리서라도 훔쳐 보고 싶어 갔던 그곳에서 기어이 상처받고 부왕께 달려온거야. 공주는 여린 손으로 부왕의 가슴팍을 치며 밉다는 말을 연발했지. 그 모습에 주변에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자 왕은 조용히 사방을 물리치고 공주를 다독여주었지.
왕 : 그 자가 그리도 좋으니?
공주는 히끅 거리며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어. 그러다 진을 다해 선잠에 드는 모습을 본 왕은 마음이 아팠지. 그리고 마침내 결심해 외척세력과 손을 잡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간택을 없던 일로 만들어야겠다고. 왕의 의사는 빠르게 전달이 되었고 그들은 흐뭇하게 웃으며 바로 의식 준비를 시작했어. 왕이 허락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야.
그들이 행할 흑 주술에는 백현이의 대례복과 강한 염원이 담긴 여자아이의 개짐이 필요했는데 왕이 한 배를 탔는데 무엇이 어렵겠어. 백현이를 모시는 상궁을 매수해 종묘사직에 고하는 예식에 필요하다고 백현이를 속여 대례복을 빼돌리고, 중전을 통해 공주의 염원이 담긴 개짐까지 구했지. 모든 준비가 끝난 거야. 날짜까지 정한 그들은 왕과 공주에게 주술을 행할 장소로 와주실 것을 청했지. 혹시라도 나중에 왕이 말을 바꾸어 그걸 빌미삼아 그들을 쳐낼 것을 방지하기 위해 확실한 공범으로 만들고자 말이야. 거기다 수결까지 받아냈지 왕은 그들의 속셈을 빤히 들여다보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었어.
그날은 이상하게 달이 흐린 밤이었지. 왕은 미행을 하겠다며 공주까지 데리고 궐을 빠져나왔어 본 이들은 모두가 왕의 사람, 백성이니 어려울 것도 없었지. 다만 뒷간에 갔다 오던 대비전 무수리 하나가 공주님까지 같이 나가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던 것은 아무도 몰랐지. 그렇게 왕과 공주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모든 의식은 준비되어있었어. 정중앙에는 의식을 거행할 늙은 여자 무당이 하나 있었는데, 그녀는 왕을 알아보고 인사를 올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진정 왕께서 이 의식을 허락하신 게 맞는지 물었지. 그리고 왕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다하자 그녀는 허탈함과 기괴함으로 뒤섞여 중얼거리며 다시 그녀가 서있던 자리로 돌아가 하늘을 올려다보았어.
무 : 부디 하늘께서 도우시기를
무엇을 돕길 원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꽤나 간절히 말한 그녀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자 의식이 시작되었어. 현란한 악기 소리와 불빛들에 공주가 몸서리치며 부왕의 품으로 숨어들어갔지. 부왕조차 함부로 숨을 쉴 수 없던 그 시간은 별안간 무당이 몸을 떨며 쓰러지자 끊긴 음악소리와 함께 끝이 났어. 주변의 하인들이 쓰러져있는 늙은 몸뚱이를 멍석에 말아 멀리 가지고 가는 것이 보였어. 왕이 그녀가 왜 그러는지 눈으로 묻자 옆에서 의식을 보고 있던 영의정이자 국부가 어둡게 웃으며 답했어.
국 : 하늘이 내린 목숨을 해하는 일입니다. 어찌 저 정도 희생조차 없겠습니까.
무당의 목숨엔 지장이 없을 거라고 말한 국부는 이제 주상전하께서도 소신들과 한 배를 타신 거라는 말로 떨떠름해하는 왕을 배웅했지. 왕이 떨떠름해하거나 말거나 이미 의식은 치러졌고 백현이는 아주 호되게 앓기 시작했어. 그래도 초반 며칠에는 얼굴이 달아오르고 쌕쌕거리는 등 고뿔 증세정도로만 보여 다들 환경이 바뀌어 탈이 난 줄 알고 수발을 하였지. 그런데 나흘째 되던 날 아침부터 일어나질 못하니까 그제야 온 궁이 발칵 뒤집힌 거야. 대비와 찬열이가 성심껏 간호하며 곁을 지켰지만 차도가 없었지. 궐의 다른 한편에서 그 애기를 전해들은 공주는 죄책감에 몸부림쳤어 왕은 간택을 무를 순간을 재고 있었고.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백현이를 돌보던 어의들은 자신들이 치료할 수 없는 이 병에 겁을 집어 먹은 상황이었어. 잘못하면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그러다 전염병이면 어쩌지 까지 하는 생각이 들어 왕에게 혹시 모르니 사가로 백현이를 보낼 것을 주청하지. 찬열이는 안된다며 반대하지만, 대사헌이 찬성하고, 타이밍을 노리고 있던 왕까지 찬성을 해버리자 백현이의 출궁준비는 속전속결로 진행되었어. 찬열이가 달려갔을 때는 이미 백현이를 태운 가마가 궐문을 벗어나기 직전이었지. 가마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대사헌영감의 얼굴도 자식걱정으로 상할 대로 상해있었어.
숨이 가쁠 정도로 달려온 찬열이가 잠시 백현이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어. 병이 옮을지도 모른다며 반대하려던 대사헌은 옆에서 비켜주자 하는 제 큰아들에게 밀려 잠시 옆으로 피해주지. 주변을 물린 찬열이가 무릎을 굽히고 조심스럽게 가마 옆에 난 창을 열었어.
안에서 눈을 감고 숨을 힘겹게 몰아쉬고 있던 백현이는 문이 열리자 옆을 보았다 찬열이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어. 그 웃음은 그대로인데 얼굴은 초췌하기 그지없어 찬열이의 마음은 누가 대못을 꽝꽝 박는 기분이었지. 백현이는 그런 찬열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을 뻗었다 병을 옮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힘이 없어서인지 손을 떨어트렸어. 허공에서 그 손을 낚아 챈 찬열이가 제 뺨에 그 손을 가져다대었지. 그 모습을 본 백현이가 힘없이 웃었어.
찬열 : 내가 여기 있는데 어딜 가는 것이냐
찬열이가 엄히 다그치듯 말했어.
찬열 : 가지마라. 주상전하께는 내 말씀드리겠다. 그러니 내 옆에 있어
찬열이는 이유모를 불안감에 쫓기는 기분이었어. 백현이를 이리 보내서는 안 될 것 같았지
백현 : 아닙니다. 괜히 제가 옆에 있다 마마께도 옮길까 저어되옵니다. 나가서 푹 쉬고 다시 들어오겠습니다.
백현이가 힘겹게 말을 이었어.
백현 : 보내 주세요.
죄 없는 입술만 짓이기던 찬열이가 힘없는 백현이 손에 줌치를 하나 쥐어주었어
찬열 : 정표다
그 안에는 파란 술띠가 있었지 어찌나 고운 파랑인지 지난번 노리개의 색과도 닮아있었어
찬열 : 지난번 정표는 내가 다시 돌려받았으니 다른 걸로 너에게 주어야 공평하지 않겠니
백현이가 줌치를 꼭 쥐었어.
찬열 : 절대 길 잃지 말고 꼭 돌아와야 해, 백현아. 꼭이야.
백현이가 고개를 끄덕였어.
백현 : 다녀올게
뒤에서 아버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백현이가 힘겹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어. 그 뒤에 찬열아 라는 말은 창을 닫는 바람 소리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지. 가마는 다시 궐문을 벗어나기 시작했고, 가마가 벗어나자 궐문은 닫혀버렸지. 찬열이만을 남겨놓고 말이야.
그 후로 어의들도 계속 들락날락 거리고, 온 가족이 걱정에 방을 떠나지 못하고 지켰지만 백현이의 병은 차도를 보일 기미가 없었지. 당연한 이야기였어. 백현이의 병은 주술에 의한 것이었으니까. 그 소식들을 전해 듣던 왕은 비밀스럽게 국구를 불러 간택을 무르자는 것을 언제쯤 공론화할지 의논하고자 하는데. 국구는 태평하게 웃기만 하는 거야. 그러더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거지. 왕이 당황하여 무슨 소리냐 묻자.
국 : 신, 전하의 성심을 어지럽히는 것을 없애고자 주술을 행하였나이다.
왕이 왜 아는 애기를 또 하냐고 짜증스럽게 말하려다 눈을 크게 떴지. ‘없애다’. 무언가 쌔한 단어였어.
국 : 본디 그 주술은 5일 안에 목숨을 앗아가는 것
왕 : 국구!
구 : 그 자의 명이 꽤나 질긴 모양인지, 10일이 지나서도 살아있긴 하나 곧 숨이 끊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오서는 아무 걱정 없이 기다리소서. 더러운 것은 모두 신의 손에 묻히겠습니다.
왕은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느꼈어. 맹세코 저는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어. 하지만 이제와 바뀌는 것은 없었지. 뿌예진 왕의 시야로 그날 밤 왕에게 질문하던 노인이 떠올랐어. 그 앞의 국구는 그저 웃고만 있었지. 그러는 사이 대비는 혹시나 하여 사가에서 주술에 대하여 잘 아는 아이를 데리고 백현이에게 가는데 그 아이는 무당에게서 키워진 아이답게 병세만보고도 금세 백현이가 주술에 걸려 그렇다는 걸 알아차렸지.
대비는 아이에게 입을 단단히 봉할 것을 명하고 궐로 돌아왔어.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었지 .행하는 이의 생명력까지 갉아먹는다는 그 주술을 누가 감히 한 나라의 부부인에게 행했다는 건지 감도 오지 않았어.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저 아래에서 무수리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는데 왕이 공주와 함께 몰래 궐을 나갔다는거야. 평소라면 입단속시키고 말았을 대비이건만 그날만큼은 그게 걸렸어. 그래서 아랫것들을 시켜 그날 왕의 행적을 살피었지. 꽤나 큰 굿판이었던지라 행적을 쫓는 건 어렵지 않았어. 다만 왕이 그랬다는 것에 대비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지.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기에 사람을 풀어 그 주술을 행하였다는 노인을 찾으라하였고, 하명한지 한시각도 되지 않아 노파는 홀연히 대비의 앞에 나타났지.
자신의 손으로 더럽힌 하늘을 다시 닦아낼 기회를 얻고자 왔다며 말이야. 대비는 제일먼저 주술을 되돌릴 방도를 물었어. 노파는 그런 건 없다 답하였지. 지금 백현이 살아 있는 것도, 종종 그 연이 강하여 주술로도 끊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지금 백현이와 찬열이라고. 둘의 연이 너무 강하여 백현이가 계속하여 숨을 붙이고 있는 것이라 답하였지. 대비가 좌절에 빠지려 하자 노파가 조심스럽게 덧붙였어. 저대로 부부인께서 이겨내시기만 하신다면 살아나실 가망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고. 그녀가 보기에는 이겨내실 것으로 보인다고 말이야.
노 : 다만...그리되면 또다시 그것들이 부부인 마마를 해치려들 것인데...그때는 모든 것을 간음키가 어렵습니다.
이미 조정은 외척세력들이 장악한지 오래였어. 백현이의 건강이 나쁘다는 것을 고하지 않고 간택에 참여시켰으니 왕실을 능멸하고 사직을 어지럽히려했던 죄를 물어 반역의 죄로 처벌해야한다는 여론을 들끓게 만들고 있었지. 거기다 왕까지 저들의 편이라면 백현이가 건강해진다한들 그 목숨을 장담키는 어려웠어. 대비는 한참이나 고민에 빠졌지. 그리고 마지막 수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어.
바로 백현이를 죽은 것처럼 위장시켜 나라 밖으로 빼돌리는 거였어. 노파도 동의했어. 이제 시간이 없어 서둘러야만 했지. 대비는 다급하게 퇴궐하려는 백현이의 형을 붙잡고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약을 쥐어주었어. 떨리는 발걸음으로 돌아온 형은 한참이나 백현이를 바라보았지. 사실 형은 사임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어. 아마 이제 곧 아버지도 관직에서 물러나시고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하게 될 것이 뻔했지. 그런데 백현이는 구할 수 있는 방도가 생긴 거야. 형의 선택은 뻔했지. 형은 백현이를 죽은 척 위장시키기로 결심했어. 다만 아버지에게는 알릴 수가 없었어.
워낙 곧은 사람이라 찬성하지 않을게 분명했으니까. 그래서 대비와 노파의 도움을 받아 백현이의 병은 신병이고, 약은 그 누구도 신기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게 감쳐주고,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라 속였지.
아버지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을 감추지 못했어. 그 모습을 보며 형의 마음도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지. 아버지는 신병인 것은 무섭지 않았어.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 이미 확실해진 상황이었으니까. 다만 그렇게 되면 백현이가 다른 이들에게 더욱 욕을 당하게 될까 그게 마음에 밟혀 결국 편히 먼저 보내주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지. 탕약에 대비가 준 약을 섞고 백현이를 깨우는 아버지의 손이 너무나 떨렸어. 이럴 줄 알았으면 망설이지 말고 하루라도 빨리 사주단자를 넣어주어 하루라도 더 행복하게 살다가게 해줄걸. 의미 없는 후회들이 가득 떠올랐지.
한편 백현이도 사실 아버지가 들은 애기를 훔쳐들어 이미 알고 있었어. 다만 밖 상황을 모르니 저 하나만 죽으면 가문은 화를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모르는 척 마시기로 한 것이었지. 기어코 백현이의 목 뒤로 넘어가는 탕약은 너무 썼어. 그래서 눈물이 계속해서 흘렀지. 그 너머로 함께 우는 아버지가 보였어. 백현이가 어렸을 적처럼 아버지의 품에 파고들었어.
백현 : 아버지 죄송해요
그 한마디에 완전히 무너진 아버지가 백현이의 이름을 부르며 대성통곡을 하였어. 그 소리가 점차 백현이의 귀에서 가물가물해져갔어. 그리고 이제 아버지마저 뿌옇게 변해갈 때 유독 선명히 찬열이가 보였지. 백현이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흘렀어. 돌아가겠다 했는데 결국 약조를 지키지 못한 마음이 백현이를 억눌렀지.
백현 : 찬열아
애처롭게 쳐다보는 찬열이의 허상을 쓰다듬으려던 백현이의 손이 허공에서 떨어졌어. 그와 동시에 맥도 멈추어버렸지. 차갑게 식어가는 아들의 위로 떨어지는 아버지의 눈물만이 오직 뜨거웠어.
곧 대비가 보낸 어의들이 공식적으로 백현이의 사망을 확인하고 궐에 보고를 올리었지. 외척세력은 백현이네 집을 풍비박살내기 위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어. 그 모든 걸 보고 있던 대비의 마음이 급해졌지. 그건 사가에 있는 백현이의 형도 마찬가지였어. 형은 넋이 나간 아버지의 품에서 백현이를 빼앗아 재빨리 염을 하고 관에 눕혔지. 관 안에 누운 제 동색이 어찌나 작고, 하얗고, 차갑던지 위장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의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렸어. 마침내 관의 뚜껑을 닫은 그가 하인들과 함께 매장하러 가려는데 아버지가 말렸지. 조금만, 조금만 있다 가자고. 하지만 약에는 약효가 지속되는 시간이 있는 법. 백현이의 형은 아까 대비가 하고 간 말 중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이 약을 의심할거라는 말로 아버지를 달래고 산으로 향했지. 그러는 사이 궐에서도 난리가 났어. 백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찬열이가 궐을 뛰쳐나가려 한거야. 모든 궁녀들과 내관들이 말리려했지만 역부족이었지. 기어코 대비까지 버선발로 달려나와야했어.
찬열 : 어머니, 보내주세요 소자가, 소자가 가봐야만 합니다
대 : 안됩니다, 대군. 자중하셔야 해요!
찬열 : 그 사람이 얼마나 무서워하겠어요. 그 작고, 어둡고, 갑갑한 곳에 혼자 어찌 보내요!
찬열이가 생각만 해도 갑갑하다는 듯 주먹으로 가슴팍을 쳤어. 대비가 제 아들을 끌어안은 채 같이 눈물을 뽑아냈어. 마음 같아서는 제 아들에게 백현이의 죽음이 어미가 만들어낸 거짓이라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수 없었지. 노파가 두 사람의 연은 주술로도 끊을 수 없는 것이라 하였어. 그렇다면 분명 돌아와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대비가 아들을 있는 힘껏 껴안았어.
찬열 : 어머니, 제발, 제발요
그러길 한참 찬열이의 눈에 멀리서 지켜만 보고 있던 왕이 보였어.
찬열 : 형님, 가게 해주세요.
넋이 나간 듯 형이라 부르며 애원하는 찬열이에 왕의 마음이 흔들렸어.
왕 : 어마마마
왕이 대비를 불렀지.
왕 : 가게 해주세요.
멀리서 백현이의 사가의 기색을 훔쳐보다 돌아온 노파가 이정도 시각이면 괜찮다는 눈짓을 해보였어. 대비가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었지. 그러자 찬열이가 용수철처럼 튀어올랐어. 그리고 백현이네 사가로 가기 시작했어. 뒤에 김내관이 힘겹게 따라붙는 것도 느껴지지 않았지. 그저 빨리 가야한다는 생각만이 존재했어. 그렇게 달려갔을 때 이미 백현이네 집은 텅 비어있었지 .백현이의 방 한가운데에 백현이의 아버지만이 멍하니 앉아있었어.
찬열 : 대사헌
찬열이가 아니라고 말해달라는 듯 그를 불렀어. 떨리는 눈으로 찬열이를 보던 그는 천천히 절을 했어. 하지만 차마 고개를 올리지 못하고 땅에 이마를 붙인 채 통곡했지.
아 : 마마, 신을 용서하지 마시옵소서.
찬열이의 다리에 저절로 힘이 풀렸어. 찬열이는 믿지 않겠다는 듯 백현이가 누워있던 보료를 더듬었어. 그곳은 아직도 따듯했지. 찬열이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슬퍼하다 손에 무언가가 잡혀 보았더니 찬열이가 준 줌치 주머니였어. 그 안에는 서찰 하나가 들어있었는데 힘없는 손길 탓에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띄엄띄엄 써있었지. 찬열이는 그것을 끌어안고 오열했어. 그러다 정신을 잃은 것을 김내관이 모시고 돌아왔지.
그러는 사이 백현이를 묻는 척까지 끝 마쳤던 백현이의 형은 하인들을 모두 물리고 다시 땅을 파기 시작했어. 그리고 관을 열어 백현이를 거세게 흔들었지. 백현이가 조심스레 눈을 떴어. 그 안에는 의아함이 가득했지.
형 : 백현아, 설명할 시간이 없어 빨리 도망쳐야해
형이 미리 빼돌렸던 백현이의 호위무사인 율에게 백현이를 업게 했어.
백현 : 형?
형 : 해가 뜨면 우리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하게 될 거야
백현이의 눈이 커졌어.
형 : 그러니 너는 멀리멀리 도망쳐 너는 이미 죽은 자이니 아무도 너를 찾지 않을 거다. 율이가 너를 네 형수에게 데려다 줄거야. 형수가 모든 걸 설명해주고 너를 도울 거다.
형은 낌새가 이상해지자 형수만은 살리고자 이혼을 하고 처가로 가게 했어. 국적이 다른 사람이니 그리하면 연좌를 피해갈 수 있을 확률이 컸거든. 그리고 대비께 말을 듣자마자 형수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녀는 기꺼이 응했지.
형 : 백현아, 넌 꼭 살아야해. 약속해줄 수 있지?
너무나 간곡한 말에 백현이가 고개를 끄덕였어. 형은 울음이 가득한 웃음을 짓고 백현이를 보냈지. 그리고 다시 봉분을 만든 뒤 내려왔어. 집 안은 고요했지. 그렇게 해가 뜨고 조정에서 외척세력은 그날만을 기다렸다는 듯 백현이네 집을 몰아갔어. 그에 아버지는 힘없이 왕에게 사약을 청했지. 왕도 자신이 지켜줄 수 없는 신하에 대한 마지막 배려로 사약을 내렸어. 아버지까지 보낸 형은 정갈한 모습으로 자진을 택했어. 왕과 아버지를 속이고, 종묘와 사직을 속인 죄를 스스로 물음과 동시에 비밀을 아는 입을 덜기 위해서였지.
찬열이가 깨어난 건 그 모든 일이 끝난 후였어. 찬열이가 멍하니 있는 사이 다시 간택이 시작되고 어여쁜 외척세력의 아가씨가 간택되었지. 그 아가씨와 혼례를 치루고 궐을 나서는 찬열이의 눈에 아무도 손대지 않아 흉해진 백현이의 집이 보였어. 찬열이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지.
저 멀리 타국에서 모든 자초지종을 들은 백현이 또한 그저 눈물 흘리다 찬열이의 혼례 소식에 찬열이가 있을 곳으로 절을 올린 후 그날 밤 율이와 함께 사라져버렸어. 대역죄인이 되었으니 이곳에 있다 괜히 형수님과 형수님의 가문에도 화를 끼칠까 두렵다는 서찰만 남기고 말이야. 그 하단에 연이 있으면 또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 믿는다는 추신에 온 마음을 실고 백현이는 그대로 바람처럼 영영 사라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