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몸부터 트는 거야.
w.마일리
“야, 너희 내일 수업 며씨냐? 나는 아홉씨야, 씨발.”
“병시나 우리 다 같은 수업이거든?”
“아 그르치. 나 취핸나봐~”
“그걸 이제 알았냐?”
백현은 오늘도 동기들과 함께 신나게 술잔을 채우고 있었다. 기말고사를 앞두고 공부는 하고 있지 않았지만 학업 스트레스는 받는, 뭐 그런 시기였다. 덕분에 아무런 이유 없이 마시던 술에 명분이 생겼다. 강의가 끝나자 마자 몇 번의 눈빛을 교환하는 것 만으로 만들어진 술자리다. 늘 함께하는 동기들이라 딱히 새로운 얼굴도, 주제도 없었지만 그래서 더 편안하고 여유로웠다. 완전한 여름 밤이다. 술집의 널찍한 테라스에 앉아 마시는 술자리는 평소보다 달고 유쾌했다. 술기운으로 볼 전체에 불그스름하게 열이 올랐다. 더울 만도 한데 이따금 앞머리를 흩트리고 지나가는 여름 밤의 바람 한 자락이 엉덩이를 꾸준히 붙이고 있게 도와주었다.
“내 고딩 친구 이번 주말에 결혼 한단다.”
“헐? 벌써? 왜? 사고?”
“엉. 친구였는데 술 먹고 잤다나? 사랑의 결실이 사랑 전에 생겨버린 거지.”
“야, 요즘엔 마음 전에 몸부터 트는 거야.”
“지롤!”
“진짜다? 요즘 트렌드 모르냐? 늦은 새끼. 존나 선비세요?”
백현이 나뒹구는 혀를 추스르려 차가운 물을 입안 가득 머금었다. 그래도 좀처럼 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아, 오늘 내가 어지간히 처마시긴 했구나, 생각했다. 여름 밤의 공기 안을 붕 붕 떠올라 부유하는 기분에 늘 옆자리에 존재하는 단단한 팔뚝에다 푹, 머리를 고꾸라트렸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백현의 턱을 추슬러 바르게 기대게 만들었다. 하여튼, 박찬열. 존나 다정한 새끼. 백현이 건조한 목구멍에 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찬열 역시 거하게 오른 술기운에 찬물을 마시며 흐릿한 시야 사이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11시 27분.
찬열이 알코올 탓에 잘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굴렸다. 오늘이… 평일이던가. 아, 내일 학교 가는구나. 그럼 평일이지. 평일 막차시간이 몇 시더라……. 그렇게 생각하자 슬슬 정리하고 일어서야 했다. 집이 같은 방향이라 늘 같이 가는 백현이 오늘 유달리 취해 보여서 추슬러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평소보다 십분 정도는 일찍 나가야 했다.
“야. 막차시간 다됐다. 가자.”
“무어어어어? 안대! 나 아직 덜마셔써!”
“웃기지 말고 일어나.”
“징짜야! 지하철보고 좀 늦게 오라 그래!”
찬열의 말에 동기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추슬렀다. 백현만 빼고. 찬열의 팔뚝에 기대어 있던 머리를 번쩍, 든 백현이 눈을 홉뜨며 찬열을 흘겼다. 녹색의 소주병을 꼬옥 쥔 채 살랑살랑 어깨를 흔드는 꼴이 꽤나 귀여워 찬열과 동기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경수가 백현의 정수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변백현 또 끼떤다.”
“끼이? 너 내가 끼떠는 거 봐써? 엉? 제대로 본적도 업쓰면서~”
백현은 정말로 울컥, 화가 치솟았다. 끼떤다니. 어디 완벽한 스트레이트가 감히 나에게 끼를 떤다 논하느냐! 하고 말하려다가 겨우겨우 눌러 삼켰다. 참아야 해. 고등학교 2학년, 자신의 성 정체성을 알았을 때부터 친구는 물론 가족에게도 철저히 숨겨온 비밀 중에 비밀이었다. 그제야 백현은 암흑과 같던 머릿속이 한결 밝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 수업에 빠지면 안되지. 안돼. 새내기 시절 F를 폭격 받고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쏟으며 계절학기를 들었던가. 과거였다면 해가 뜰 때까지 부어라, 마셔라 였을 텐데 다행히도 이 자리에 있는 친구들 모두 피눈물을 쏟으며 계절학기의 고통을 함께했었다.
백현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찬열이 백현의 팔꿈치를 단단하게 잡아 고정했다. 이 작은 친구는 다른 동기들 보다 훨씬 눈도 많이 가고 손도 많이 갔다. 그럼 짜증이 날만도 한데 또 타고난 애교나 사랑스러움이 있어서 남자가 득실거리는 공대 안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술집을 나와 서로 간단히 인사를 하고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아쉬울 것도 없었다. 열두 시간을 채우기도 전에 다시 마주할 얼굴들이었으니까. 백현이 비틀거리는 걸음을 추스르려 노력했다. 그러면서 저 높이 있는 찬열의 어깨에 억지로 팔을 둘렀다.
“내 칭구~”
“뭐하냐?”
“내 칭구~ 차녈~”
헤실헤실 웃는 백현의 얼굴에 찬열이 엉거주춤 허리를 숙여주었다. 그제야 온전히 팔을 감은 백현은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꺄르륵, 하고 여고생처럼 웃었다. 차녈이, 차녈이 키 작아져따. 이제 나랑 좀 맞네. 너 너무 커써! 그런 백현을 보며 찬열은 어쩔 수 없이 뇌를 점령한 알코올을 휘발시켜야 했다. 나까지 정신을 놔버리면 우린 어느 전봇대 앞에서 내일 아침 해를 맞이할 것이다. 분명히. 찬열은 덜그럭거리는 뇌로 지하철을 타고, 백현의 집을 들렸다가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루트를 짜고 있었다. 아마 큰일이 없으면 그대로 시행될 수 있는 일이다.
“아, 섹스하고 싶따.”
“……?”
“섹스하고 시퍼! 섹스!”
여름의 밤공기가 그렇게 후덥지근하지도 않았는데 찬열은 온 몸의 땀구멍이 열리는 기분을 느꼈다. 백현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의식이 백현의 입을 틀어막게 했다. 여기는 아직 환한 대학로의 술집 거리였고, 북적이는 사람들이 백현과 찬열을 끊임없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찬열이 힘 조절을 하지 못하고 백현의 입을 꽈악 누르자 백현이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휘저었다. 웁! 우웁! 우으읍! 그제야 찬열이 화들짝 놀라 손을 거뒀다. 백현이 눈을 홉뜨며 찬열을 노려보았다.
“야, 씨발, 너 나 죽이려고 그르냐?”
“아니. 네가 이상한 말을 하잖아.”
“이상한 말? 뭐, 섹스하고 싶다고? 섹스하고 싶은걸 섹스하고 싶따 그러지 그럼 뭐라 그러냐? 씨발, 배켜니는 쎄쎄쎄 하고 시퍼요, 이로까?”
찬열은 잠시 눈을 깜박이는데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백현인지 확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3년이라는 긴 시간을 주구장창 붙어있는 동안 백현은 음담패설을 즐기는 친구가 아니라는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헌데 얘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걸까. 아니 애당초 섹스라는걸 하고 싶다고 나에게, 그러니까 동기에게, 그것도 남자인 3년 동기에게 말하는 이유가 뭘까. 라고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찬열은 백현이 아닌지라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저 얼른 얘를 침대에 던져놔야겠다. 재워야지. 그리고 내일 학교에 가면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만큼 놀릴 테다. 그렇게, 생각했다.
“야.”
“응. 가자, 집에. 금방 가.”
“나랑 잘래?”
“얼마 안남았……뭐?”
찬열은 그 순간 생각했다. 역시, 얘가 지금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오해하고 있었구나. 예를 들면 긴 생머리가 잘 어울리는 우리 과의 꽃 백희라던가, 뭐 그런.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비록 찬열은 백희와 비교하면 경악스러울 만큼의 큰 덩치였지만 백현은 지금 제대로 걷지도 못할 만큼 알코올에 젖어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엉? 너 정도면 갠차눈데.”
“야. 내가 뭐가 괜찮냐. 너 내일 아침에 후회한다.”
“박차녈 정도면 갠찬지~ 얼굴도 잘생겨꼬~ 호오, 이렇게 보니까 진짜 내 스타일이네, 너.”
찬열이 답할 말을 찾지 못해 입만 벙긋거렸다. 그러니까 백현은 지금, 찬열을 올곧게 찬열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근데, 어째서, 왜? 백현이 찬열에게 잡혀있던 팔꿈치를 풀어내고 바르게 섰다. 그러더니 주위를 흘끔흘끔 살폈다. 뭘 하려고 하는 걸까, 찬열은 이제 백현의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울 지경이었다. 백현이 뒤꿈치를 들썩이며 찬열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 사실은 게이다?”
쿨럭, 쿨럭쿨럭, 찬열은 목구멍에 아무런 것도 걸리지 않았는데 폐 속 가득 이물질이 찬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당혹과, 경악과,
그리고 반가움이었다.
반가움이라. 그래, 반가움. 솔직히 말하자면 찬열도 ‘게이’라는 단어에 속할 수 있는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보편적 게이가 그렇듯이 보수적인 대한민국 사회에서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어 아닌 척, 모른 척 하며 살고 있던 거였다. 그런데 백현이 게이라니. 내 3년 동기가 게이라니. 이렇게… 이렇게 귀여운 애가 게이라니! 찬열은 잠시 만세를 부르고 싶었다. 삭막하던 게이 인생에 햇살이 비치는 것 같았다.
“놀라기는~ 3년이나 여치니가 없었는데 것도 몰랐냐! 천하의 변배켠님이 인기가 업쓸 리 있나!”
“……”
“차녈이 마니 놀라써?”
찬열은 이제 위에 잔뜩 쏟아 부었던 알코올이 완전히 휘발하고 청정구역에 들어선 것을 느꼈다. 머릿속이 비정상적일 만큼 깨끗해졌다. 그러니까, 변백현은 게이였고, 지금 섹스를 하고 싶은 거고, 그 섹스의 대상으로 나에게 ‘끼’를 부리고 있었다. ‘변백현 또 끼떤다.’ 경수의 목소리가 번개처럼 스쳐갔다. 변백현은 실로 지금 저에게 끼를 떨고 있는 거다. 찬열은 화끈거리던 술기운이 광대에서 목구멍으로 목구멍에서 가슴팍으로, 가슴팍에서 뱃속으로 그리고 그보다 좀 더 딱딱하고 작은 어딘가에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변백현.”
“웅?”
“나도 게인데?”
찬열의 말에 이번엔 백현이 꿈벅꿈벅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찬열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는 순간, 딸꾹, 하고 놀람을 표현하고야 말았다. 그런 백현에 찬열이 실소했다. 자기가 꼬셔놓고 지금 발을 못 뺄 것 같으니까 놀란 거지? 귀여워라. 이게 뭐라고 귀엽냐.
“여친이 너만 없었냐? 나도 없었지?”
“……히끅, ……히끅.”
백현은 그제야 자신이 방금 어마어마하게 큰 비밀을 입 밖으로 내뱉었는지 깨달았다. 3년 내내 그렇게 열심히 숨겨왔는데. 겨우 술 처먹고 커밍아웃을 하다니. 것도 절친인 동기에게. 병신이냐. 나가 뒤져라, 씨발. 근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동기 놈은 자기도 게이란다. 만세를 불러야 하는 건지 좆됐다고 땅을 굴러야 하는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뇌까지 출렁거리고 있던 알코올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갈래?”
“어, 어딜?”
그런 백현을 아는지 모르는지 찬열은 여전히 다정하고 멋지게, 웃어 보였다.
“모텔.”
***
목구멍이 불모지 같았다. 쩍쩍 갈라지는 것이 자주 경험하던 숙취와는 또 다른 느낌이라 백현은 의아했다. 평소보다 훨씬, 무거운 눈두덩이가 눈꺼풀을 올리는 것을 방해했다. 간신히 뜬 눈에 들어온 풍경은 낯선 몸뚱어리의 상태만큼이나 이질적이었다. 붉은색의 벽지에 싸구려 금색의 장미가 패턴인 천장은 절대로, 알고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뭐지. 저 요상한 천장은 뭘까. 내 방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집에 귀신이라도 들었나. 엄마가 나 모르게 무당을 불렀던 걸까. 요즘 무당은 장미를 좋아하나? 것도 금색? 그렇게 멍청한 생각을 했다. 어쩌면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는 현실을 피하고자 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때, 툭하고 가슴팍에 올려지는 묵직한 팔을 느꼈다. 백현은 화들짝, 놀랐으나 어찌된 일인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가장 만만하게 움직일 수 있는 눈동자를 또르륵, 굴려 팔의 주인을 확인했다. 그렇게 시선의 끝에 걸려온 사람은… 아마도 시력이 퇴화한 것이 아니라면, 박찬열. 내 동기. 내 절친. 근데 왜 네가 옷을 홀딱 벗고 내 옆에 누워있냐는 거지.
“씨발… 좆됐어…….”
백현이 한숨처럼 욕을 흘렸다. 어떡하지. 어떻게 봐도 얘랑 지금 잔건데. 그냥 코- 하고 잠을 잔 거면 괜찮은데 섹스를 한 것 같다. 아니, 같은 게 아니라 한 거지. 화끈거리는 뒤와 찌뿌둥한 허리가 어젯밤 일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어찌됐든 이렇게 있을 순 없으니 몸을 일으켰다. 그래, 일으켰다. 분명히 일으켰는데 저 요상한 천장은 왜 아직도 내 시야 안에 존재하는 것일까. 혹시 박찬열의 팔이 이백 킬로그램쯤, 됐던 걸까. 백현이 슬그머니 찬열의 팔뚝을 밀자 큰 저항 없이 밀려났다. 백현이 후우- 한숨을 내쉬며 오늘따라 유독 무거운 자신의 팔을 들어올렸다. 눈동자에 가득 차는 자신의 팔이 낯설었다. 손목 가득 나있는 손자국하며, 옅고 짙은 잇자국, 그리고 입술의 흡입력이 만들어낸 울혈들이 보기 싫게 낭자되어 있었다.
“이… 개새끼…….”
백현이 눈썹 끝을 툭, 떨어트렸다. 팔이 이러면 허리는? 다리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어 백현은 두개골이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 처참함을 눈으로 담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아서 백현이 끙끙거리며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역시나 가슴팍과 허벅지는 엉망이었다. 정말 말 그대로 엉망. 내가… 강간을 당했던가, 라고 의심해보았지만 생각해보면 분명히 쪽쪽거리며 룸 문을 다급하게 열었던 것 같은데.
저 솥뚜껑만한 손으로 억세게 잡힌 골반이며 허벅지가 뚜렷하게 다섯 개의 손가락을 나타내고 있었다. 도장이냐, 개새끼야? 백현이 조용하게 말을 흘렸다. 이 상황에서 찬열을 깨우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울혈이나 잇자국이 보기만 해도 아파서 백현은 차마 오랫동안 시선을 줄 수 없었다.
백현이 협탁에 올려진 자신의 핸드폰을 힘없는 손으로 집어 들었다. 시간을 확인하자 강의 시작 40분 전이었다. 일단 학교에 가야겠다. 그렇게 별 생각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확, 고꾸라지는 몸에 백현은 간신히 침대맡을 움켜쥐고 큰 사고를 면할 수 있었다. 절로 욕지기가 치솟았다.
자신의 몸 같지 않은 몸을 추슬러 간신히 샤워를 마친 백현이 룸을 나서려다 자신의 팔목을 바라보았다. 그새 옅어졌을 리 없는 멍자국들이 여전히 자신들의 존재를 마구 내뿜고 있었다. 백현이 코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밖으로 나갔다간 가정폭력을 당하는 학생이나 혹은 검은 세계의 발을 들이고 사는 사람으로 오해 받을 것 같았다. 몰라도 시선을 집중하는 데에는 탁월하겠지. 백현이 잠시 머리를 굴렸다. 늘 그랬듯이 반팔 하나만 걸치고 집에서 나왔던 터라 가릴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백현이 찬열을 바라보았다. 두껍고 단단한 팔뚝은 어제와 같이 매끄럽고 깔끔했다. 또 욕지기가 치솟았다. 지는 저렇게 멀끔하면서 나는, 나는 씨발……. 찬열에게 다가간 백현이 주먹을 쳐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아직은, 찬열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서있을 자신이 없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찬열의 얇은 니트를 주웠다. 아마도 어제 자신이 벗겼던 것 같은데.
모르겠다, 일단은 학교, 학교에 가자.
백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모텔을 나섰다.
.
.
.
‘흐으, 차녈아, 아파, 읏, 아프…….’
‘참아.’
‘안대, 으응, 싫어, 거기 깨물지마! 아!’
아, 좆같다. 진짜, 좆같아. 공학개념을 설명하고 계시는 교수님의 단조로운 목소리 위로 찬열과 자신의 목소리가 마구 뒤섞여 흘렀다. 결국은 참지 못하고 쿵, 두꺼운 전공 책 사이로 얼굴을 쏟아냈다. 경수가 의아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꼈지만 그런 것 따위, 지금 백현에겐 아무 상관도 없었다. 전공 책의 차가운 온기도 광대에 오른 열을 식혀주지 못했다.
‘그만, 흐앗, 그만하고 시퍼… 응? 그마안-‘
‘후으, 아직 멀었어.’
‘시러… 죽을 것 같아, 응, 흐읏, 앗,’
‘허리 똑바로 들어.’
씨발, 잘도 그런걸 숨기고 있었다는 거지. 평소에는 그렇게 다정하고 잘 챙겨주면서. 원래 그런 성격인 거야 아니면 그냥 잠자리 스타일이 그렇게 좆같은 거냐. 뒤통수를 잡아 누르고 골반을 움켜쥐던 찬열의 손길이 생생하게 떠오를 땐 깜짝 놀라 파드득, 몸을 떨어야 했다. 오늘따라 유독 이상한 백현에 경수가 필기하던 샤프로 자신의 입술아래를 꾹, 눌렀다.
“변백현, 어디 아프냐? 아직 술 덜 깼어?”
“아, 아니……”
“근데 박찬열 이 새끼는 왜 안 오냐? 카톡도 안보고? 어제 집에 갈 때 무슨 일 있었어?”
“일? 일이라니? 무슨 일? 아니- 전혀- 아무 일도 없었지!”
“미친놈아, 닥쳐. 지금 수업 중이거든?”
“아……”
백현이 사나운 눈초리를 한 교수에게 어색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게, 박찬열 이 새끼는 왜 안 오냐. 설마 아직도 모텔에서 자나. 아닌데, 퇴실시간 지났는데. 아니야, 차라리 나타나지 마라. 아, 이제 어떡해. 걔 얼굴을 어떻게 봐. 만나면 뭐라 그래.
하긴 나만 숨기고 있던 것도 아니고, 박찬열도 철저하게 숨겨왔었으니, 아마 저만큼이나 당황스럽고 생각이 많을 테였다. 일단 오늘은, 오늘은 마주치지 말자. 제발. 부디.
그렇게 백현은 강의가 모두 끝나고 저녁을 먹자는 동기들의 손길을 뿌리치며 집에 도착했다. 부모님의 눈에 띌까, 헐레벌떡 자신의 방으로 뛰어와야 하는 것에 또 찬열을 씹었다. 너무 커서 소매를 접고 접었는데도 손등을 다 덮는 찬열의 니트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여전히 울긋불긋 자리잡고 있는 멍에 짜증이 치솟았다. 나 어떡해… 이 더운 날씨에 살갗이란 살갗은 다 가리는 옷을 입고 다녀야 한다. 거울 앞에 서 목덜미에 피어있는 울혈을 꾹꾹 힘주어 문질렀지만 오히려 더 붉어지기만 했다. 백현이 까득, 이를 씹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들었다.
[박찬열 이 개새끼야. 너 왜 학교 안 왔어.]
[어제 기억은 나냐? 안 나면 뒤진다.]
[내가 너 때문에 이 더운 날씨에 긴 팔 입게 생겼잖아. 내가 섹스하자 그랬지 나 씹어먹으라 그랬냐? 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이 사라졌다. 채팅창을 꽤 오래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 답이 오지 않았다. 백현이 분노에 찬 손가락을 놀렸다. 액정을 두드리는 엄지손가락이 액정을 부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야. 왜 읽어놓고 답장 안 해.]
[씹냐? 먹고 나니까 별로야? 흥미가 떨어졌어?]
.
.
.
그 시간 찬열은 찬열대로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자신의 성적 취향은 가끔 즐기던 원나잇으로 충분히 파악하고 있던 상태였다. 썩 좋은 쪽이 아니라 같은 게이와 잠자리를 하더라도 감추고 또 감췄는데 그걸 백현에게 표출해 버릴 줄은 정말로, 몰랐다. 안타깝게도 기억력이 좋아 하나도, 빼먹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엉엉 울던 얼굴, 찌푸린 눈썹, 축축히 젖은 혀와 뜨거웠던 입안. 그리고 허스키하면서도 가느다란 목소리와 한 손에 기분 좋게 잡히던 허리춤이 여전히 생생했다.
그만하고 싶다고 애원하던 목소리를 외면하고 그렇게 짐승같이 허리짓을 했었는데. 저의 커다란 손에 틀어 잡혀 발버둥치던 백현의 유약한 몸뚱이가 정상일 리 없었다. 아무리 쌓였어도 그렇지. 아무리 술을 마셨어도 그렇지. 이제 백현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절교를 당한다 해도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우우웅- 울리는 진동에 베개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백현만 아니길. 아니 백현이길, 아니, 아니 백현은 아니길. 병신 같은 불안이 핸드폰 화면을 키는 그 찰나에 수십 번이고 뒤바뀌었다.
역시나, 진동의 주인은 백현이었다.
잔뜩 분노가 섞인 메시지에 찬열이 입술을 짓이겼다. 일단은 사과부터 해야겠지?
[미안해]
그리고 그 다음은? 뭐가 미안하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아, 이건 아니다. 지워.
[내가 원래 침대에서는 좀 과격…]
아, 이건 더 아니잖아. 지워, 지워.
[네가 너무 예뻐서…]
윽, 백현이 당장 뺨을 후려치러 저의 집까지 달려올지도 몰랐다.
[다음엔 살살할게…]
미친놈. 다음이 어디 있어? 아니지, 있을 수도 있지… 아니, 없으려나.
“아악!”
찬열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 위를 굴렀다. 뭐라 그러냐고! 미친 박찬열아 대체 어쩌자고 변백현 몸뚱이를 다 물어뜯어놨니. 짐승도 아니고. 아직 잇새에 씹히던 백현의 살덩이가 생생했다. 괜히 침이 고이는 것 같아 찬열이 이를 씹었다. 아, 진짜 내 스타일이었는데. 취향에 딱 맞는 허리춤하며, 골반도, 몸에 비해 살짝 살집 있는 허벅지는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메시지의 존재는 잊고 다시 어젯밤으로 되돌아가는 찬열을 꾸짖듯이 핸드폰이 우우웅- 울렸다. 아마 백현의 재촉 메시지이리라, 생각했는데 진동이 규칙적으로 끊이지 않았다. 찬열이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액정 가득 백현의 이름이 떠 반짝이고 있었다. 마른 목구멍에 침을 삼킨 찬열이 녹색의 아이콘을 꾸욱, 눌렀다. 그러자 진동이 끊기며 화면이 바뀌었다. 01. 02. 03. 올라가는 통화시간을 멍하니 바라보던 찬열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귓가에 핸드폰을 가져갔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야, 박찬열. 너 전화 받은 거 다 알거든? 네 숨소리가 오죽 큰 줄 아냐?’
“어? 어… 백현아, 안녕?”
‘안녕은 얼어 죽을. 왜 읽어놓고 답장 안 해!’
“하는 중이었는데…….”
‘지랄하네! 너 일분에 열 개씩 카톡 보내잖아! 뭐 장문의 사죄 편지라도 쓰고 있었냐?’
“아니,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찬열은 자꾸만 말끝을 흐리게 되는 자신을 원망했다. 이런 성격은 결코 아닌데. 뭐하나 잘한 것이 있어야 고개를 들지. 웬일로 건너편에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찬열이 이불자락을 의미 없이 구겼다.
백현은 찬열의 말을 곰곰이 되씹고 있었다. 찬열의 말도 맞았다. 솔직히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자고 끼부린 것도 자신이었고, 게이라고 먼저 커밍아웃한 것도 자신이었다. 물론 찬열의 취향이 이 모양, 이 꼴이었으면 그러지 않았을 테지만, 뭐 어쨌든 취향의 한 부분이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피해자인 척, 찬열만을 원망하고 있는 것도 아주, 우스운 일이었다.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나니 백현 역시 할 말이 없어 꾹, 입을 다물었다. 꽤나 오랜 시간 핸드폰에서는 서로의 숨소리만 들려왔다. 결국 백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쩌지?’
“응?”
‘우리 이제 어떡하냐고! 다시 친구할 수 있겠냐, 너?’
“어… 음…….”
친구. 친구라. 분명히 24시간 전만 해도 둘은 더할 나위 없이 절친한 친구였다. 없는 일로 하고 되돌아가면 되지 않느냐, 라고 말하면 찬열은 단호히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아직까지 백현의 촉감이 손바닥에 생생한데, 말랑한 살결이 잇새에 남아있는데 친구로 돌아가 그를 욕정서린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흘러내리는 땀방울, 찌푸린 미간, 나른한 눈동자의 임팩트가 너무 강해서 눈을 감으면 자연히 1080P의 고화질로 재생되곤 했다. 그러니까 찬열에게 친구라는 관계는 더 이상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사귈까?”
‘미친놈아! 우리는 그냥 실수였어! 사고친 거라고! 근데 사귀긴 뭘 사겨!’
“그런가……. 그래도 사귀면 사고가 아니라 사귀는 단계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잖아.”
‘이상한 데서 논리적이지 마!!’
“미안…….”
찬열이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며 이물자락을 짓눌렀다. 잠시 정적을 유지하던 백현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그냥, 없던 일 하자.’
“뭐?”
‘우리는 그날 일 술 먹고 기억 못하는 거야.’
“…….”
‘야! 왜 대답 안 해!’
“싫어.”
‘싫긴 뭐가 싫어!! 어쩔 건데 그럼!!’
찬열이 익숙한 제 방의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은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입안 가득 맴도는 말이 있는데, 말을 꺼내도 되려나. 잠시 고민했다. 뭐, 죽이기야 하겠어.
“사귀자.”
‘미친놈이 또-‘
“진짜야. 사귀자.”
찬열은 자신이 내뱉어 놓고도 어떤 반응이 되돌아올지 두려웠다. 아마 어마어마한 욕들이 곧 수화기를 타고 들려오리라, 생각하며 미리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핸드폰 건너편이 조용했다. 설마, 끊은 건가. 찬열이 오른쪽 눈부터 슬그머니 뜨고는 백현의 숨소리에 집중했다.
‘……아파.’
“응?”
‘너랑 섹스하는거 아프단 말이야. 나는 섹스 없이는 못 만나. 근데 너랑 만나면 학교 못 다닐 것 같다고.’
허…? 찬열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니, 정말 단지 그 이유란 말인가? 물론 연인관계에서 주기적인 잠자리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백현이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다. 앞서 말했든 백현이라는 친구는 음담패설이나 남성의 욕구에 큰 관심이 없는 것 같았으니까. 그럼 결론이야 뻔하지 않은가. 찬열은 한번 맛본 백현의 몸을 손에서 놓을 자신 따위,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럼 다시 해.”
‘뭘?’
“섹스. 다시 해. 내가 아프지 않게 잘 할게. 다시 해보고 나랑 사귈지 말지 결정하면 되잖아.”
솔직히 찬열은 자신이 없었다. 백현의 하얗고 말랑한 살덩이가 눈앞에 있으면 아마 다시 이를 새우지 않고는 못 견딜 테다. 그래도 그건 나중이었다. 일단 사귀고, 어마어마하게 애정을 쏟아주면 약간의 격정적인 섹스는 이해해 줄지도 모른다. 사랑의 한 표현 방식으로 볼 수 있지도 않을까. 말 같지도 않은 소리지만 애당초 이 관계가 정상적인 시작은 아니었다. 또 아니면 옷으로 가려지는 곳만 씹고 빨면 괜찮지. 백현이 긍정의 대답을 내뱉지도 않았는데 찬열의 머릿속은 이미 백현을 어떻게 잡아먹을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단지 상상만으로 입안에 침이 고였다.
‘지금?’
“어? 뭐? 지금?”
‘그래. 지금 갈게.’
미처 대답을 할 틈도 없이 끊긴 전화에 찬열이 잠시 넋을 잃었다. 지금 당장 보여준다는 말은 아니었는데. 어쩐다. 찬열이 끊어진 수화기를 여전히 든 채로 멍하니 콧잔등을 문질렀다.
어쩌긴 일단 씻어야지. 찬열이 부리나케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벌써부터 이가 간지러운데 괜찮을까? 아니 괜찮을 것이다. 일단 지금은 잘 추스르고 추슬러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 후에, 입맛에 맞춰 길들이는 재미도 쏠쏠할 테다.
문득 어제저녁 술자리에서 친구놈들이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요즘엔 마음 전에 몸부터 트는 거야.’
들을 땐 별 생각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거기다 트렌드라잖아. 트렌드. 21세기 20대면 트렌드정도는 따라줘야지. 또 아나? 백현과 사랑의 결실이 생겨서 결혼할지도. 경악에 물든 동기들의 얼굴을 상상하며 찬열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아마도, 술이 덜 깬 듯 하다.
어쩌면 백현에게 취한 걸지도 모르지.
찬열의 콧노래가 끊이지 않고 욕실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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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쓰라고 독촉해주신 죵희님과 쿠아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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