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과 함께
W.마일리
上_
아직 팔다리가 완전히 성장하지 못한 어린 백현은 혼자 씻지를 못했다. 게다가 아홉 살의 나약한 정신은 홀로 욕실에 들어가 있는 것도 두려워했다. 습기가 만들어낸 물방울이 떨어져 부서지는 소리에도 작은 어깨를 움찔거리며 떨곤 했다. 어머니는 집에서 어여쁜 막내아들인 백현을 그가 나이가 들어 손수 거절을 말할 때까지 기쁘게 씻길 생각이었다. 그런 백현이 오늘은 혼자 씻겠다, 어머니에게 통보를 해왔다. 아직 자신의 허벅지까지도 크지 못한 어린 아들의 말에 어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할 수 있겠어?”
“네.”
작고 동그란 머리통이 아래위로 움직이며 긍정을 표했다. 어머니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어미의 손길을 부끄러워할 2차 성징이 나타날 나이는 절대 아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마음 한 구석에 작은 걱정이 샘솟았지만 거기서 더 키워나가지 않기로 했다. 열손가락을 채 채우지 못하는 어린아이치고는 성숙한 백현을 믿기로 한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조금 처져있던 백현의 눈썹이 원래의 자리를 찾았다.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한 백현이 나무 복도를 뜀박질해 욕실로 향했다.
개량한복을 벗은 백현이 작은 손으로 단정하게 옷을 개켰다. 그리고는 옅게 한숨을 내쉬며 욕실 안으로 발을 디뎠다. 나무욕조 안은 어머니가 미리 받아둔 따뜻한 물이 가득 차있었다. 잠시 그곳에 시선을 던졌던 백현이 김이 서린 거울 앞에 섰다. 파르르 떨리는 손이 거울 앞의 허공에서 망설였다. 곧 입술을 말아 문 백현이 거울을 닦아냈다. 작고 하얀 몸은 어제와 같았는데 한가지 다른 것이 있었다. 손바닥만한 검은색의 반점. 목덜미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곳이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옷으로 가릴 수 있어 오늘 하루는 들키지 않고 버텼지만 어머니가 발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터였다.
대대로 십이지신[十二支神]을 모셔오던 백현의 가문은 아주, 가끔 이렇게 직접 신의 표식이 내려지곤 했다. 글을 읽을 수 있을 때부터 가문에 대해 엄격한 교육을 받아온 백현은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신이 택한 몸종. 축복이고, 선물이고, 기적이라 했다. 어머니께 말씀 드리면 틀림없이 아주 기뻐할 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백현은 기쁘지 못했다. 나이가 들어 신을 받을 수 있게 되면 더 이상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없다 했다. 늘 인자하게 웃어주시는 아버지도, 따뜻한 어머니도, 부드럽게 머리를 흩트려주는 큰 형도, 장난이 심하지만 다정한 작은 형도 볼 수 없을 테다. 그것이 말도 못하게 두려웠다. 이 세상에 가족이 모두고 전부인 어린 백현에겐 당연한 반응이었다. 혹여나 문지르면 옅어질까 작은 손끝에 힘을 주어 매만졌지만 별 다를 바가 없었다.
나이가 들수록 검은 반점은 받아들일 신을 암시하는 문양으로 바뀌어 간다고 했다. 어떤 문양으로 변할까. 백현이 책에서 봤던 십이지신의 문양을 떠올렸다. 이왕이면 귀여운 토끼였으면 좋겠다고, 아직은 어린 백현이 생각했다.
***
백현은 자신의 방에 놓인 거울 앞에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천천히 내쉬었다. 작은 목젖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천천히 어깻죽지의 옷자락을 내리자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문양이 드러났다. 길다랗고 단단한 몸뚱이를 틀고 눈을 감고 있는 용[龍]. 토끼가 새겨지길 바랬던 어렸을 때의 소원을 여태까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용일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용은 비를 내리고, 물을 공급하며, 홍수를 일으키는 등 물과 관련된 모든 것을 주재하는 신이다. 이 땅을 비옥하게 만들 수도, 생명이 살 수 없는 불모지를 만들 수도 있는 신인 것이다. 용은 바다와 호수, 하천, 연못, 우물을 비롯하여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살고 있다 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용의 문양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철저하게 몸가짐을 바르게 할 것을 교육했다. 용신께서는 고결하고 강하신 분이니 흠 하나 있는 육체가 되어선 안 된다. 부드러우신 분이지만 노하시면 이 세상을 손쉽게 뒤엎으실 수 있는 분이니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그분께서 너를 선택하신 것을 후회하시게 만들지 마라.
그렇게 백현은 얼굴조차 제대로 상상해본 적 없는 존재를 위해 숨을 쉬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온 지 딱 십 년이 흘렀다. 이제 열아홉. 신이 몸종으로 들이기에 가장 좋은 나이라 들었다.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친히 지상으로 발걸음을 하셔서 데리러 온다고 했다. 그래서 백현은 보름달이 뜨는 날만 되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혹여 가족과 마지막이 될까, 두려워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몸을 떨곤 했다. 마음 같아선 어머니와 아버지의 침대 위를 비집고 들어가 잠을 청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호된 꾸지람을 들을 터였다.
그 날이 오늘도 반복되고 있었다. 백현이 고개를 들어 활짝 열려있는 창을 바라보았다. 유난히 밝은 달이 동그랗게 제 모습을 완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해가 뜬 것처럼 눈부셨다. 덕분에 불을 키지 않아도 방안이 환했다. 신께서 지상으로 내려오시며 세상을 눈에 담기에 딱 좋은 밝기다. 백현이 무릎 위에 단정하게 올라가있는 주먹을 꽉, 힘주어 쥐었다.
제발, 오늘은 아니길. 아직은 아니길. 올해는 아니길.
이제는 완벽해진 용 문양을 옷자락이 가려냈다. 백현이 거울을 덮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정한 발걸음이 침대로 향했다. 이불을 들춰내고 몸을 뉘인 뒤 목까지 꼼꼼하게 덮었다. 보름달이 환한 날이면 두려움에 젖어 말똥말똥한 눈을 감아내는 것이 힘겨웠는데 오늘은 달랐다. 금세 무거워지는 눈꺼풀에 의아함을 느끼기도 전에 눈을 감고야 말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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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칼을 흩트리는 손이 차갑다 못해 시렸다. 익숙한 어머니의 손은 항상 따뜻한 온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단단하고 찬 손의 주인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백현이 흐릿한 시야를 거둬내려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흩날리는 새하얀 머리칼을 보는 순간, 잠시 숨을 멈추어야 했다. 몸을 일으킬 수도, 파르르 떨리고 있는 주먹을 쥘 수도, 소리를 질러 어머니를 부를 수도 없었다. 금빛의 눈동자와 마주하는 순간 머릿속이 공허할 만큼 가라앉았다. 그런 위압감을 가진 존재였다. 세상을 짓누르는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가진 남자. 백현은 그가 자신이 십 년 동안 살아왔던 이유, 목적의 주체임을 깨달았다.
용신. 호는 찬열. 나의…… 神.
“안녕, 아가?”
백현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던 찬열이 부드럽게 입 꼬리를 당겨 웃었다. 새벽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이 달빛에 비춰 빛나는 것 같았다. 그의 하얗고 긴 도포자락이 묘하게 일렁이며 움직이고 있었다. 백현이 침을 삼켰다. 낮고 무거운 찬열의 목소리가 마치 땅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인사를 무시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란 교육을 분명히 받았고 잘 실천해왔는데, 굳은 입술이 어떠한 소리도 내뱉지 못했다. 찬열이 백현의 눈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커다랗고 하얀 손이 인간과 다름없는 생김새였는데도 묘하게 달리 느껴졌다.
“일어나 보겠니?”
백현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찬열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시릴 만큼 차가운 손에 움찔, 몸을 떨자 그가 또 부드럽게 웃었다. 마룻바닥에 발을 디디고 서자 찬열의 큰 키가 여실히 느껴졌다. 뒤꿈치에 힘을 주고 올곧게 서자 찬열이 손을 놓고는 두어걸음 뒤로 물러섰다. 백현의 모습을 금색의 눈동자가 새길 듯 진득하게 담아냈다. 그 시선에 백현이 작은 목젖을 움직였다. 마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그의 앞에 서있는 것 같았다.
“잘 자라 주었네. 딱 내가 생각하던 것과 같이 자랐어.”
찬열이 만족한 듯 미소 지었다. 생각보다 용신이 미소에 관대한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내쉬었다. 찬열이 다시 백현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천천히 팔뚝의 옷자락을 끌어내렸다. 백현이 그 손길에 놀라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단단히 옭아매고 있는 찬열의 금색 눈동자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손 쉽게 맨 어깨가 드러나고 짙은 청색의 문양이 달빛에 비쳐 뚜렷하게 나타났다. 부유하는 공기가 맨 어깨에 너무나도 잘, 느껴져서 백현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찬열이 그 문양을 검지손가락으로 조금 힘주어 매만졌다.
“내 문양이야. 알고 있었니?”
“……네.”
백현이 처음으로 소리라 명할 수 있는 것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백현의 대답에 찬열이 이번엔 눈까지 살풋 접으며 웃음을 만들었다. 그래, 변씨 가문인데 그 정도 가르침은 했겠지.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찬열이 다시 백현의 눈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 고스란히 달빛이 담겨있었다.
“이제 갈 시간이야. 네가 클 때까지 너무 오래 기다렸어.”
“지금…… 가야 하나요?”
“응. 너희들이 성인이라 말하는 스무 살까진 기다려 주려 했는데, 네가 너무 아름다워서 참을 수 없었단다. 미안해.”
우습지? 나는 천 년을 살아왔는데 고작 스무 해를 기다리기 힘들었다는 게 모순처럼 느껴질 거야. 하지만 실로 그랬으니 너무 원망하지마렴. 찬열의 말에 백현이 눈썹 끝을 떨어트렸다. 찬열의 말대로 그가 원망스러웠다. 일년. 일년이면 인간에게는 아주 긴 시간이다. 셀 수 없는 식사를 가족과 함께 할 수 있고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었는데. 찬열이 내밀었던 손을 올려 백현의 눈가를 쓰다듬었다.
“나와 함께 가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것들이 네 손에 쥐어질 거야. 내 약속하마.”
신은 약속을 어기지 않아. 그러니 너무 크게 상심하지마. 백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저는 감히, 찬열의 말을 거부하고 외면할 권리가 없었다. 한낱 인간이 아량을 베풀어 비옥한 땅에 살 수 있도록 허락해주는 신을 거절 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백현이 눈앞에 있는 찬열의 손을 잡았다. 그에 찬열이 다정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얽어 백현의 손을 조금 더 굳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는 손을 이끌어 백현의 허리를 단단히 움켜쥐곤 창문을 향해 걸어갔다. 어떤 일이 닥쳐올지 알 수 없어서 백현이 질끈 눈을 감았다. 하지만 몸이 뜨는 느낌도, 바람이 뺨을 스치며 지나가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찬열의 손길이 떨어져 나갔다. 의아함에 눈을 뜨자 자신의 하얀 도포자락을 벗고 있는 찬열이 보였다.
“네 몸으로는 하늘의 온도가 따뜻하지만은 않을 것 같구나.”
그가 백현의 어깨 위로 도포자락을 부드럽게 둘렀다. 커다란 옷에 잡아 먹힌 것 같은 백현의 모습에 그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백현은 괜히 볼에 열이 차는 것 같았다. 찬열이 비정상적으로 큰 것인데. 그의 도포에선 물 냄새가 났다. 호수에 다가가면 느낄 수 있는 습하면서도 상쾌한 향. 그리고 바람냄새. 백현의 콧잔등을 톡, 두드린 그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아가, 이제 진짜 가는 거야.”
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엔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순식간에 몸이 떠올랐다. 백현과 찬열이 사라진 작은 방에는 환한 달빛만이 차올라 빈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그것이 홀로 남겨진 방을 외롭지 않아 보이게 했다.
***
神의 몸종. 백현은 그렇게 불려왔다. 목덜미에 검은 반점이 생기고 나서부터 쭉 타인에게 그렇게 불렸는데, 찬열을 눈앞에 두고 ‘몸종’으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연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 어머니는 그저 신이 명하는 대로, 원하는 대로 행하면 된다고 했다. 그럼 너그러우신 신께서 세상에 축복을 내려주신다고. 풍요로운 곡식을 주시고, 고난과 역병을 거두어 주신다 하셨다. 그래서 그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헌데, 찬열은 그저 가만히 백현을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침상에 반쯤 누운 채로 턱을 괴고 무엇이 그리 신기한지 눈조차 깜박이지 않았다. 그 시선을 견디고 있던 백현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소, 송구하오나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러자 찬열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넓은 찬열의 침실에 그의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가득 찼다. 마치 물길이 흘러가는 소리와 같았다. 찬열의 웃음소리에 백현이 당황해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그가 웃자 산들바람이 창으로 들어왔다. 하얀 휘장이 달빛에 흩날렸다. 백현은 태어나 처음 보는 크기의 달빛이었다. 분명히 같은 하늘아래에 있는 달일 텐데 훨씬 밝고 커다랬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백현의 가지런한 속눈썹이 달빛에 비쳐 반짝였다. 찬열은 그 속눈썹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바라만 보고 있던 것인데 백현은 그것이 못내 견디기 힘들었나 보다. 찬열이 침상에서 일어나 백현에게 다가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용의 비늘모양이 어렴풋이 새겨진 하얀 도포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신비할 만큼 하얀 머리칼이 반짝였다. 찬열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도톰한 방석에 단정히 앉아있는 백현의 모습이 그리도 귀여울 수 없었다.
“송구해? 그런 말투는 어디서 배웠어?”
“아, 그게…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아서 그랬어요.”
너무나도 진실한 대답에 찬열이 결국은 참지 못하고 백현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백현이 그 손길에 조심이 고개를 들어 찬열을 마주했다. 여전히 빙긋, 웃고 있는 모습에 잘못을 한 것 같진 않아서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내쉬었다. 찬열이 친히 무릎을 굽히고 백현과 눈동자를 마주했다. 금빛의 눈동자가 신비해서 백현은 예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 눈을 피할 수 없었다.
“그냥, 이렇게 있으면 돼.”
“네?”
“내 몸종은 이미 차고 넘칠 만큼 많아. 딱히 네가 돕지 않아도 괜찮으니, 그저 이렇게 있으면 돼.”
찬열에게 몸종이 많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의 품에 안겨서 커다란 하늘궁에 들어섰을 때부터 허리를 숙여오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봤기 때문이다. 백현의 또래로 보이는 몸종도 있었고 찬열만큼 머리가 하얀 노인도 있었다. 허면, 어째서. 백현은 이해가 힘들었다. 아홉 살부터 지금까지 함께해와 이제는 정까지 들어버린 찬열의 문양이 이유 없는 표식처럼 느껴졌다. 가라앉는 백현의 눈동자에 찬열이 입을 열었다.
“아가, 실망했니?"
“……아뇨.”
“정말?”
“네. 그럼, 그럼 저는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게 일인가요?”
뾰로통한 백현의 말에 찬열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아,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데려오길 잘했다. 조금 더 커버렸으면 이렇게 귀여운 모습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누구보다 조숙해 보이지만 또 반대로 누구보다 순수한 아이였다. 찬열이 손을 올려 처진 백현의 눈가를 쓸어 내렸다. 그 손은 통통하고 부드러운 볼을 지나고 턱을 지나 찬열의 문양이 새겨져 있을 목덜미도 향했다. 그 손길에 백현의 어깨가 흠칫, 굳었다. 여전히 찬열과 백현의 머리칼을 흩날리는 산들바람이 달이 흔들리는 소리와 별들이 반짝이는 소리를 가지고 왔다.
“아니, 이렇게 나랑 노는 게 아가의 일이지.”
찬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백현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었다. 그에 찬열이 아쉬운 듯 백현의 목덜미에서 손을 떼더니 백현의 눈앞에 가져갔다. 백현은 이제는 알았다. 그의 손짓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백현이 하얗고 시린 손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찬열이 부드럽게 그 손을 감싸 쥐고는 힘주어 백현을 일으켰다.
“가자, 놀러.”
.
.
.
“와……”
백현이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소리는 작게 내뱉었는데 입은 잔뜩 벌려져 있었다. 찬열의 손에 이끌려 온 곳은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였다. 구름 위에 존재하는 호수.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풍경인지라 그 경이로움은 배가 되고 또 거기의 곱절이 되었다. 지상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 달과 별들이 눈부실 만큼 호수에 비쳐 반짝이고 있었다. 새로운 하늘이 호수 안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백현의 모습에 장난스럽게 웃은 찬열이 손을 가볍게 휘젓자 호수 안에서 물로 이루어진 용이 솟구쳐 올랐다. 길다랗고 두꺼운 몸뚱이가 달빛을 머금어 푸르게 빛났다. 쩌억- 입을 벌렸다 다문 용이 빠르게 백현을 향해 다가왔다. 그에 화들짝 놀란 백현이 저도 모르게 찬열의 옷자락을 꾹, 움켜쥐고는 그의 뒤로 몸을 숨겼다. 찬열이 결국 참지 못하고 큭큭거리며 소리를 내 웃었다.
“괜찮다. 만져보렴.”
“네? 하, 하지만…”
분명히 물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날카로워 보이는 용의 이빨이 쿵쾅쿵쾅 백현의 심장을 빠르게 뛰게 만들었다. 찬열이 거리낌없이 용의 아가리 밑으로 손을 넣어 턱을 매만졌다. 그러자 용이 눈을 감고 찬열의 손길을 느꼈다. 그에 백현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뒤로 물러섰던 발걸음을 내디뎠다. 작은 손이 허공에서 움찔거렸다. 찬열은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꿀꺽, 작은 목젖을 한번 움직인 백현이 꾹, 눈을 감고 용의 콧등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축축히 젖어 드는 손이 느껴졌다. 당연했다. 물로 이루어진 잠깐의 형체일 뿐이었으니. 그래도 보통의 물과 다르게 단단한 질감을 가지고 있어서 손을 얹고 문지를 수도 있었다. 크흥- 하고 용이 기분 좋은 듯 콧김을 내뿜자 작은 물방울이 흩날렸다. 그 물방울들에 젖어버린 백현이 한쪽 눈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마음에 드니?”
“네, 멋져요. 또, 아름답고.”
“내가 지상보다 훨씬 좋은 것을 네 손에 쥐어 줄 것이라 약속했잖아.”
찬열이 주머니에서 동그란 옥돌을 하나 꺼냈다. 하늘색의 투명한 옥돌이었다. 찬열이 그것을 백현의 손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니 하늘색의 옥돌이 별과 같이 빛났다. 그 빛에 백현과 찬열의 얼굴이 밝아졌다. 곧 원래의 모습이 된 옥돌이 왠지 따뜻하게 느껴졌다. 백현이 그 옥돌을 꼭, 힘주어 쥐었다.
“이걸 쥐고 이곳에서 이 용을 부르면 언제든, 네 앞에 나타날 거야.”
“예?”
“내가 주는 선물이다. 앞으로 아가 친구가 될 것 같으니 나중에 이름이라도 지어주렴.”
찬열의 말에 백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찬열이 친히 선물해준 내, 용. 나의 친구가 될, 용. 오롯이 나만 부를 수 있는 용. 백현이 돌을 소중하게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친구라 생각하니 옥돌이 정말로 온기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늘에서의 첫, 친구였다. 이 세상 누구도 가지지 못한 멋진 친구다. 용이 백현을 보고 웃는 것 같았다. 백현이 커다란 용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눈을 휘었다. 이제 내 친구야, 너. 한참이나 마주하는 시선에 찬열이 작게 입을 삐죽였다. 짜증스레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러니 용이 조용히 물속으로 들어가 사라져버렸다. 그것에도 백현의 얼굴 가득 피어있는 웃음꽃을 지워내진 못했다.
“감사합니다, 용신님.”
“그, 용신이란 소리. 하지 말거라. 그냥 찬열이라 불러줄래?”
“하, 하지만…”
“찬열이라 불렀으면 좋겠는데. 아가에게 내리는 내 첫 명이다.”
백현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감히 신의 호를 부르라니. 듣도보도 못한 예였다. 어머니께서 아시면 호된 꾸지람을 하실 터였다. 헌데 또 명이란다. 어떡하지. 백현이 입술을 짓이겼다. 그러면서도 손에 쥔 옥돌은 놓지 않았다. 한참을 우물쭈물하던 백현이 결국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찬열이 얇은 입술이 벌어지는 것에 집중했다.
“그럼 찬열님이라 부를게요.”
“뭐?”
“찬열님이요. 찬열님.”
또렷한 백현의 눈동자에 찬열이 멍청한 표정을 만들었다. 찬열님이라. 썩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예상 외의 수확을 거두어 마음에 들었다. 백현이 찬열님이라 부르는 것이 손을 꾹, 말아 쥘 만큼 어여뻤기 때문이다. 백현의 찬열님이란 발음은 영- 별로였다. 차녈님이요. 차녈님. 살짝 새는 발음이 어찌 그리도 잘 어울리는지. 찬열은 웃음을 삼키려 꽤 애를 써야 했다. 찬열이 마치 선심을 쓴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감사합니다, 찬열님.”
찬열이 결국은 참지 못하고 백현의 허리를 잡아채곤 하얀 이마에 꾹, 입술을 누르고야 말았다. 백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찬열을 올려다 보았다. 흩날리는 하얀 머리칼과 대비되게 찬열의 광대가 불그스름해져 있는 것 같았다. 백현이 찬열의 입술이 닿았던 부분을 문질렀다. 어머님이 자기 전에 해주시는 입맞춤을 어째서 찬열이… 까만 눈동자에 의문이 가득해서 찬열이 큼큼, 헛기침을 했다.
“원래 말 잘 듣는 몸종에게 자주 하는 행동이다.”
어이없는 거짓에 찬열이 속으로 자책을 했다. 얇은 입술에서 어떠한 말이 나올지 답지 않게 긴장까지 해야 했다. 신으로써 체통이란 조금도 없는 말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찬열이 짜증스레 목덜미를 긁었다. 헌데 백현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찬열이 흘끔, 내려다본 백현은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맥이 탁 풀리는 느낌에 찬열의 어깨가 가라앉았다. 어떤 미친 신이 몸종에게 입맞춤을 퍼붓고 다니겠니. 근데 그것을 수긍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었다. 생각보다 백현은 훨씬, 더 순수한 것 같았다. 그냥 스무 살까지 기다릴 것을 그랬나.
하지만 그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깟 옥돌이 뭐라고. 물로 만들어낸 허상이 뭐가 그리 좋다고. 옥돌을 바라보며 해사하게 웃고 있는 백현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역시, 오늘 데려오길 잘했다. 달이 오늘따라 밝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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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연재각?... 너무 짧아서 죄송합니다... ㅜㅠ
찬열이의 모습은 셋쇼마루를 생각해쑴당
네, 모두의 첫사랑 그 셋쇼마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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