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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161203 : 푸른사자 : #주신_단어로_짧은_연성

#주신_단어로_짧은_연성

W. 푸른사자


짧은 단편 두 개입니다.


1.  눈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그 해 처음 내리는 눈이었다. 아직 쌓이기에는 날이 따듯해 눈은 조용히 나부끼다 땅에 떨어지는 순간, 녹아 사라졌다. 구름을 떠나 소멸하여 물방울로 돌아가기 전까지의 그 짧은 시간 동안 눈은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온통 하얀 세상. 마당에서는 신나게 뛰어다니는 강아지들과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현이 있었다. 현이 데려올 때까지만 해도 각기 다르게 상처받은 녀석들이었다. 누군가 손만 내밀어도 움츠려들면서도 누군가의 손을 간절히 바라는 애처로운 생명체들. 그랬던 녀석들이 어느새 저렇게 즐겁게 뛰어다니는 모습에 현은 문득 마음 속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다른 이가 생각나 뒤를 돌았다.

 

현의 예상대로 열은 창틀 뒤에 숨어 얼굴 절반만 내민 채 밖을 구경중이었다. 어찌나 정신 없이 쳐다보던지 현이 자신도 모르게 설풋 웃음을 터트릴 지경이었다. 현이 조심스럽게 창문을 두들겼다. 그 작은 소리에도 열은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뜨며 현을 바라보았다.

 

어느 비 오던 날 집 앞에 쓰러져있는 걸 현이 무턱대고 주워 온 그 날 이후, 열은 많이 밝아졌지만 지금도 종종 겁 먹고 상처 입은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럴 때마다 현은 제 마음이 아린걸 느꼈다. 그는 태생적으로 약한 것들에 약했다. 현은 겁 먹은 눈을 향해 따스하게 웃어주며 손짓 했다.


 

"우리 산책해요."


 

손을 내밀며 환히 웃자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열은 서둘러 창가에서 사라졌다. 잠시 집 안에서는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 급히 줍는 소리 등이 시끄럽게 울렸다. 눈이 녹아내리며 옷이 눅눅해져 현은 잠시 재채기를 했다. 하지만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대신 잠시 후 열이 나오자 아무 말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눈 오는거 처음 봐요?"

 


현이 알려준 데로 옷들과 목도리,장갑 따위를 어설프게나마 두르고 나온 열을 잠시 뿌듯하게 바라보던 현이 나지막히 물었다. 열은 마치 눈을 처음 보는 아이같았다.

 


"아니요."


 

열은 고개를 저었다. 그에 머쓱해진 현이 코를 한 번 훔쳤다.


 

"처음 보는 건 아닌데, 맞거나 숨지 않고 보는건 처음이에요."


 

정작 말을 한 열의 표정은 무심한데 현의 마음은 덜컹하고 떨어졌다. 가끔씩 열은 지금처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아픈 과거를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게 너무나 익숙하고도 당연해 아픈 것인줄도 모르는 모습은 현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이었다. 현은 위로하듯 열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리고 아픈줄도 몰라 그것이 위로인줄도 모르면서 열은 그저 현이 잡아준 손이 좋아 고개를 숙인 채 환히 웃었다.


 

"그거 알아요? 첫눈 오는 날에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데요."


 

현이 분위기를 바꾸려 애써 밝게 웃으며 열을 올려다 보았다. 열은 맑은 눈망울을 빛내며 현을 보았다. 가끔 이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현은 살랑거리는 강아지 꼬리와 찡긋거리는 귀가 보이는것만 같았다. 그래서 무의식 중에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아직 소원 못 빌었는데 우리 같이 빌래요?"



열이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둘은 잠시 손을 놓고 눈을 감은 채 소원을 빌었다. 먼저 눈을 뜬 현이 무슨 소원을 비는 지 두 눈을 꼭 감고 열중해있는 열의 얼굴을 보았다. 눈 내리는 배경 속 열의 얼굴은 마치 한 폭의 명화 속 천사의 얼굴만 같았다. 현은 손을 뻗어 삐뚤어진 열의 모자를 바로잡아 주었다. 그 손길에 눈을 뜬 열이 눈을 깜빡였다. 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원 빌었어요?"


 

다시 산책을 하던 중 현이 물었다. 열은 현의 물음에 볼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비,비밀이에요."

"나한테도요?"

 


열이 고개를 열심히 흔들었다.

 


"치, 실망이네요."

 


그런 열을 놀리고 싶은 마음에 현이 점짓 삐진체를 하고는 앞서 갔다. 잠시 제자리에서 눈을 깜빡이던 열은 뒤늦게 따라가며 현 주위를 맴돌았다.

 


"화났어요?"

"그럴리가요"

 


현의 퉁명스러운 말에 열은 이제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다 울겠다싶어 현이 표정을 풀고 열을 쓰다듬어주려던 순간 고개를 푹 숙인 열이 현의 두 손목을 잡았다.

 


"소원 말하면 요정이 삐쳐서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그래서, 그래서 말 못한건데"

 


손목을 잡은 그의 두 손에는 사실 힘이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열의 손이 더 하얗게 질려있었다.

 


"현씨가 화내면, 나는"

 


물기어린 말을 끊고 현이 열의 볼에 입술을 가볍게 맞췄다.

 


"장난이에요."

"그럼 나 말 안해도 괜찮아요?"

 


빨개진 얼굴을 해서 순진무구하게 바라보는 열에 제가 어린아이를 건드린 질나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 현은 그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환히 웃은 열은 저 멀리서 달려 오고 있는 강아지들어게 달려가 함께 눈밭을 굴렀다. 눈오는 하늘을 울리는 즐거운 소리들에 현은 그저 나지막하게 웃으며 걸어갔다.

 

그 어떤 변덕쟁이 요정이라도 저 모습을 보았다면 들어주지 않고는 못버틸거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2.My Turn To Cry





생일 날 밤 하늘 아래였다.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와 처음 눈이 마주친 것은. 큰 눈에는 맑은 어둠이 한가득  담겨있었는데 그것은 청명한 밤하늘과도 닮았으며 끝을 알 수 없는 바닷 속과도 닮아있었다. 마치 끌려가듯 그 눈을 응시하던 것도 잠시, 그는 크게 몸을 틀어 물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건 물 위에 떠 있는 비늘 한 조각이었다. 한 때 그의 일부였을 그것은 밤 하늘의 한 조각 별과 달처럼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옷이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것을 건졌을 때, 그때서야 알 수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인어였다. 바다의 아름다운 포식자, 인어.

 

선원들은 그를 불길한 표식이라 여겼다. 가련한 인간의 정신을 홀려 바닷 속으로 이끄는 간악한 존재. 그러면서도 그들은 인어의 입맞춤을 향한 기묘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인어에게서 입맞춤을 받은 이는 영원토록 그 인어를 떠날 수 없게 된다. 대신 꼬리만 없을 뿐 인어와 마찬가지로 물 속에서 숨을 쉴 수도 있으며, 물 속에서는 그 어떤 상처도 치유가 되는 등 온전히 바다와 하나가 된다. 어쩌면 바닷 사람이 꿈꿀만한 최고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열망은 공포를 억누르지 못했다. 그래서 인어는 언제나 공포의 대상이었다. 연약한 존재다운 선택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모두 잠든 밤이 되어서야 그를 만나러 가곤 했다. 사실 만난다는 표현 자체가 맞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는 언제나 바닷 속에 몸을 숨긴 채 두 눈만을 수면 위로 내밀고 멀리서 나를 훔쳐보고 있었으니까. 그 기묘한 밀회가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되었지만 그와 나는 단 한 마디 말조차 나눠보지 못했다. 그저 서로를 볼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어느날 그의 바다로 뛰어든 것은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그날 따라 달은 밝았고, 그의 눈동자는 더욱 밝게 빛났다. 그 속에서 미약하게나마 느껴졌던 공포와 거리감. 물은 그에게 은신처였던 것이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나는 그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못하리라는 확신을 주고싶었다. 다른 이는 몰라도 나는 그에게 그럴 수 없었다. 스스로 자신의 심장을 할퀴는 머저리는 없을테니.

 

수영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두운 밤 아래 바닷 속은 어두웠으며, 격식을 차린 옷은 몸을 무겁게 휘감았다. 그렇게 천천히 가라앉으면서도 두 눈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주 잘 보라는 듯이. 그 눈을 보며 그는 가라앉는 속도보다도 느리게 다가왔다. 그의 꼬리가 물결을 가로지르며 생긴 물방울들이 포근하게 감싸왔다. 그리고 호흡이 한계에 다다르고 눈이 감겼다 다시 떠졌을 때 그는 나와 함께 수면 위에 떠올라 있었다. 차가울 거라 생각했던 그의 품은 따듯했다.


 

"옷이 젖을까 가까이 오지 못할거라 생각했어요."

 


나를 육지에 올려준 그는 육지 가까이 해안에 앉아 그렇게 말했다. 고작 이깟 옷이 막아줄거라 생각했다니. 자신의 아름다움을 잘 몰랐던걸까,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을 잘 몰랐던걸까. 다분히 순진한 그에 나는 너무 오래 물 속에 있어 터져 나오는 기침을 막지 않으며 웃었다.

 


"인간한테 물은 위험해요. 특히 인어가 있을 때는."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다시 물 속으로 사라졌다. 그 말의 뜻을 제대로 안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밤이었다. 평소보다 해가 빨리 져 선원들은 해가 진 후에도 한참을 간판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은 그 노래는 바다 아래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인어다!"

 


누군가 외쳤다 . 하지만 그 외침에는 힘이 없었다. 노랫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선원들도 배의 가장자리에 가까워졌다. 수면 바로 아래로 인어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비쳤다. 선원들과 눈이 마주친 인어들은 싱긋 웃으며 손짓했고, 선원들이 손을 뻗는 순간.

 


"으아아아아!"

 


인어들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선원들을 깊은 심연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물 밖으로 나온 인어들의 노래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마치 쇠 꼬챙이로 톱을 연주하는 기괴함과 닮아있었다. 선상이 온갖 끔찍함으로 뒤덮이고 나는 멀리서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러다 불현듯 간절한 눈길로 나를 보며 내게 손짓했다. 이건 인간을 꼬여내기 위한 간계인걸까.

 

그 무엇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조심스럽게 나의 두 뺨을 감싸쥐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동족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려던 것이었다. 선상 위 멀뚱멀뚱 서 있던 나를 다른 인어가 보았더라면 필시 나를 가까이 유인해 심연에 파묻었으리라.

 


"그 손 놔 이 괴물아!"

 


그 영원같던 시간은 누군가가 휘두른 횟불에 의해 끝났다. 그 횟불은 그의 팔뚝을 스치고 지나갔고, 끔찍한 소리와 함께 그의 두 손이 나에게서 떨어졌다. 주위를 둘러보자 그나마 정신을 차린 선원들이 인어들을 향해 횟불을 휘두르고 있었다. 바다 그 자체인 인어에게 유일한 약점은 불과 쇠였다. 나를 놓아준 그는 동족들과 함께 심연 속으로 사라졌다.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듯한 미소만 남기고.


 

혼란스러운 밤이 지나고 살아남은 이들은 죽은 이를 추모하고 서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부지런히 복수를 준비했다. 불과 날카로운 쇠붙이들 그리고 밀랍. 또 다시 해는 읽찍 저물어 버리고, 선상은 어제와 같이 분주했다. 다른 것이라고는 선원들의 귀가 밀랍으로 막혀있다는 것과 손에는 불과 쇠붙이들이 굳세게 잡혀있다는 것이었다.

 

노래가 시작되었다. 어제보다도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하지만 두 귀가 막힌 선원들에게는 전진을 명하는 북소리에 불과했다. 인어들의 꼬리가 만들어내는 물거품들이 가까워지고, 나는 황급히 눈으로 그를 찾았다. 그리고 어제와 다르게 망설임 없이 나에게 다가오는 그와 그를 향해 쇠붙이를 높이 쳐올리는 선원이 눈에 들어오자 그대로 뛰었다. 여태까지는 그가 나를 살렸다면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급작스럽게 찬 바닷물에 뛰어들자 온 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그를 끌어안았다. 내 두 발목에 굳건히 묶인 쇠붙이들은 그와 나를 심연 속으로 안내했다. 그는 그것을 풀어내려했으나 파란 불꽃과 함께 쇠붙이들은 그의 손길을 거부하고 내 몸을 더욱 옭아매었다. 파란 불꽃이 그를 상처입힐까 걱정되었으나 나를 살리고자 수면으로 올라갔다 그가 위험에 처하는 것 보다는 훨씬 나았다.

 

숨이 천천히 가빠왔다. 나는 그의 팔뚝을 애처롭게 쓰다듬었다. 아름답던 그의 팔뚝은 불이 낸 생채기가 새겨져있었다. 나는 마지막 숨을 그곳에 불어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그에게서 힘을 풀었다.

 

천천히 가라앉는 몸의 감각도 사라져가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순간 입술에서 가벼운 촉각이 느껴졌다. 아주 섬세하고도 가벼운 간지러움.



인어의 입맞춤이었다.

 

 



*인어 기본 설정은 캐리비안의 해적(사실 4편은 제대로 보지 않ㅇ...)과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빌려왔습니다.

-인어는 기본적으로 바다에 들어오는 인간을 바다를 침범했다 생각하고 공격하는데 그 방법이 노랫소리로 꾀어낸 후 물에 빠트려 죽이는거지요.

-인어의 약점은 불과 쇠로 불은 조금만 닿아도 마치 장작이 타오르듯 되며 쇠의 경우 닿으면 스파크가 일면서 경미한 화상과 통증을 유발합니다.

-인어의 키스를 받으면 인간의 특성은 유지되면서도 인어의 특성도 갖게 됩니다.